세계사(World History)/세계문화, 문명사(World Cultures&Civilizations)

나치들은 전쟁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김쓰 2023. 8. 26.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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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 김쓰

 

2차 세계대전의 주범 나치 범죄자들은 전쟁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자료들을 잘 찾아볼 수 없어서 주관적인 자료들이나,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자료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글을 써보겠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은 1945년 8월에 있었던 중대 전쟁범죄인의 소추 및 처벌에 관한 협정, 일명 런던 협정에 의거해 재판이 열리었다. 재판관의 구성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각 1명씩 임명하였다. 기소된 사람은 24명이었으나 2명은 판결이전에 숨졌다. 나머지 22명중 3명은 무죄, 12명은 교수형, 3명은 종신형, 4명은 유기형을 받았다.

 

* 유기형 : 일정기간의 구금을 내용으로 하는 자유형. 유기 징역, 유기 금고 등 

 

재판대상이 되는 범죄 내역은 통상적 전쟁에 대한 범죄, 평화에 반한 죄, 인도에 반한 죄 3가지를 판별하여 각각 B급 전범, A급 전범, C급 전범으로 나누어 판결을 집행하였다고 한다. 기소된 인원이 적은 이유는 통상적으로 나치 최상급 수뇌부들만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다루었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은 1945년 11월 10일부터 1946년 10월 1일까지 지속되었다. 

 

* 인도에 반한 죄 : 인도적 범죄, 반인도적 범죄, 반인륜 범죄

 

Persilschein

 

Persilschein은 나치 수용소에 감금되었던 죄수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명서를 말한다. 독일인이 Persilschein을 가지고 있는 것은 깨끗한 정치적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치 범죄자로 의심받고 있다하더라도 Persilschein을 가지고 있다면 일종의 면죄 증명서처럼 받아들여져 재판과정에서 무죄로 빠져나온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주로 돈있는 고위급 관직에 앉아있던 나치 범죄자들이 이를 다른 이들로부터 구매하여 범죄이력을 조작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페이퍼클립 작전이란?

 

1945년 독일의 본이 연합군에 의해 점령된다. 그 당시 한 폴란드인이 본대학교 화장실에서 종이뭉치를 발견하였고, 종이뭉치에는 누군지 모를 사람들의 리스트가 빼곡히 적혀있었다고 한다. 리스트는 영국과 미국 등의 정보부에 전해지게 된다. 리스트의 이름은 오센베르크 리스트로 불리우는데, 당시 독일의 국방연구소의 수장 오센베르크 박사가 사상검열을 통해 뽑은 과학자 및 엔지니어의 명단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게되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정부에서는 합동정보목표기구를 만들어 특별한 나치 당원 및 협력자들을 채용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들은 과학자 및 엔지니어들과 그의 가족들로 오센베르크 리스트에 근거해 채용되었다. 명목상으로는 그들을 지정된 장소로 수용시키라는 명령이었으나, 그들은 곧 미국으로 이주시켜 진다. 그 수는 무려 1,600여명 정도로, 가족까지 포함하면 6,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나치 당원과 협력자들을 채용하는 것은 금지였으나, 정보기관에서는 신분을 세탁하고 범죄혐의를 제거하여 그들을 이주시켰다고 한다.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인한 미국의 이득

 

페이퍼클립 작전 당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막 시작하였을때이다. 이때의 미국, 소련 양국은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리던 경쟁을 하던 시기였다. 알다시피 그 경쟁의 첫 승리자는 소련이었다. 소련에서 먼저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것이다. 이에 미국정부에서는 급하게 NASA(미국항공우주국)을 만들게 된다. 이때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넘어온 과학자 및 엔지니어들도 합류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미국에선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아폴로 11호를 만들어내게 된다. 냉전시기 동안 독일에서 넘어오게 된 이들은 미국의 군사력과 과학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게된다.

 

소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미국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인 1946년 오소아비아킴 작전을 통해 2,200여명의 독일의 과학자 및 엔지니어들과 그들의 가족들까지 포함한 6,000여명의 독일인을 데려가게 된다. 어찌되었든 페이퍼클립 작전 및 오소아비아킴 작전을 통해 독일 나치의 과학자 및 엔지니어들은 전범으로써 처벌받지않고, 과학자 및 엔지니어로써 생활할 수 있었다.

 

남미로 간 나치 범죄자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나치 범죄자들은 남미 국가들로 피신한 경우가 많았다. 남미국가들로 나치 범죄자들이 피신한 이유는 아마도 남미국가들이 2차 세계대전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고, 유럽, 소련의 영향력이 비교적으로 낮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선택이 들어맞았는지 일부 남미 국가들에서는 나치 범죄자들의 송환에 비협조적이었다고 한다.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 칠레 대통령 가브리엘 곤살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우고 반제르, 파라과이의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는 나치 범죄자들에게 돈을 받거나, 기술을 받는 등으로 자국 망명을 묵인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많은 점범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홀로코스트의 나치 전범,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의 전범으로 유대인 박해의 실무책임자였다.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의 추적으로 잡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특별기로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아이히만은 9개월간 집중적인 심문을 받았는데, 이때 독일계 유대인이었던 애브너 레스 경감이 막대한 증거기록을 통해 그를 심문했다고 한다. 

 

이후 그에 대한 재판은 1961년 4월 11일 시작되었고, 증인심문은 56일간 지속되었으며 총 112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증언하였다고 한다.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자신을 그저 상부의 지시에 따른것에 불과할 뿐이었다고 하였으나, 1961년 12월 15일 텔아비브의 공개재판에서 법정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3심 끝에 기각되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1962년 5월 31일 23시 58분에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비교적 최근인 2018년에도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것을 속이고 1949년에 미국으로 이민한 야키프 팔리가 95세의 나이로 법원의 추방결정이 난지 14년 만에 독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그의 나치 협력 전력은 2001년 미 법무부의 조사에서 발각되었고, 연방법원에서 2003년 전시 행위와 인권 유린, 이민 사기 등을 근거로 시민권을 박탈했고 이어 이듬해 추방 명령을 하였다고 한다.

 

미 의회와 유대인 단체 등에서는 추방을 촉구하였으나, 독일,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에서 수용을 거부해 14년째 이루어지지 않았었다고 한다. 결국 독일과의 협상을 통해 야키프 팔리의 수용 약속을 받아내었다.

 

비록 나치 범죄자들에 대한 청산이 온전히 다 이루어지지 못했을지언정, 나치의 범죄자들은 생을 불안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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