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쓰 2023. 9. 15.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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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 김쓰

 

중국역사 상 태평성대를 꼽으라면 청나라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다스렸던 1661년부터 1796년이었다고 한다. 그 외의 시대에도 당 태종, 당 현종, 명 성조의 시대가 괜찮았던 시대로 꼽힌다. 딱히 중국의 태평성대 시기를 알고 있어서 건륭제를 주제로 삼은 것은 아니고, 좋아하는 중국 사극 속 배역인 위영락의 실제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 효의순황후이고, 그 남편이 건륭제이다보니 그에 대해서 써보려고 한다.

 

건륭제는?

 

건륭제의 이름은 홍력, 시호는 순황제, 묘호는 고종이다. 옹정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태자밀건법에 따라 1735년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하였다. 위에서 말했듯이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통치하던 시기를 강온건 시대라고 하여, 이 시기를 중국 봉건사회의 태평성대 혹은 황금시대라고 한다. 

 

건륭제는 1766년 대소금천 토사 반란을 평정한 후에 토사제를 폐지하고 주와 현을 설치하였다. 건륭제는 강희제나 옹정제와는 달리 무력통치보다는 문화통치를 매우 중시하였는데, 대표적 예로는 1736년 박학홍사과를 설치하고 학자들에게 여러가지 서적을 편찬하게 한 것이 있다. 다양한 업적을 남기었는 건륭제는 이후 재위한지 60년이 되던 해에 조부인 강희제의 재위기간인 61년을 넘는 것을 꺼려하여 다음해 그의 15번째 황자인 옹염에게 선위한다는 칙서를 발표하고 다음해 선위하고 태상황제에 오르게 된다. 

 

건륭제와 사고전서

 

건륭제는 1773년 사고전서관을 정식으로 개설하게 하여 황실의 친족들인 친왕과 대학사들을 파견하여 사고전서의 편찬을 책임지게 하였다. 우리가 흔히 아는 논어, 맹자 등의 유가의 고전 서적을 포함한 여러가지 역사, 과학기술 등을 모두 포함한 네 부류의 서적을 사고라고 한다.

 

사고전서 편찬은 10년이 걸렸으며, 1782년 3,503종 78,337권으로 된 사고전서가 완성되었다. 당시 사고전서 7부를 베껴 각기 보관해 두었는데 그 중 3부가 전쟁으로 불타버렸다고 한다. 후대에 고대 중국 역사와 문화를 평가하고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로 남았다. 다만, 사고전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건륭제는 청나라에 불리한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소각하였는데, 금서로 소각당한 서적이 3천여종에 달하였다고 한다. 

 

태자밀건법이란?

 

건륭제는 태자밀건법에 의해 선출된 황제이다. 태자밀건법은 역사 속에서도 꽤 유명한 황위 승계 방법인데 건륭제의 할아버지인 강희제때부터 시작되어 온 것을 그의 아들인 옹정제가 조금 바꾼 것이다. 태자밀건법이란 가장 능력이 뛰어난 황자의 이름을 건청궁 편액 안에 봉인된 상자와 자신의 품에 집어놓고 황제가 죽은 후에 그 이름이 맞으면 그황자를 즉시 다음 황위에 올리는 방법이다.

 

강희제때부터  시작되어 온 것을 옹정제는 봉인된 교지와 함께 내무부에도 봉인해놓은 밀지를 맡겨두어 이 두가지가 모두 맞아야 황위를 승계할 수 있게 방법을 바꾼 것이다. 옹정제의 경우엔 살아있을적 후에 건륭제가 되는 제 4황자 홍력을 보친왕으로 삼아 국사를 처리하게 하였었다고 한다.

 

효의순황후 위가씨

 

효의순황후는 정식 황후는 아니었다. 효의순황후 위가씨는 살아있을적 건륭제의 후궁이었다. 1745년에 입궁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위귀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빠른 속도로 영빈을 거쳐 영귀비라는 칭호를 가진 황귀비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황귀비는 명나라 7대 황제인 대종 경태제 때 창안된 것으로 황후에 준하는 후궁 중 최고직위였다.

 

건륭제와의 사이에서는 4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중 한명이 후에 가경제가 되는 15번째 황자 옹염이다. 효의순황후는 건륭 40년이 되던 시기에 사망하였는데 건륭제는 이에 영의황귀비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효의순황후가 황후로 기록되는 이유는 1796년 아들인 가경제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효의순황후로 추존하였기 때문이다. 사후의 시호는 효의공순강유자인단각민철익천육성순황후라는 매우 긴 명칭이지만 간략하게 효의순황후로 알려져 있다.

 

효의순황후에 대한 이야기, 독살설

 

건륭제에게는 세 황후가 있었는데, 그들의 죽음은 다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귀비로 생을 마감하였던 효의순황후의 죽음에 대해서는 야사가 얽혀있다. 그녀는 살아있을적 건륭제에게 놀랍도록 총애를 받은것으로 알려져있는데,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가 10년간 4남 2녀를 연달아 낳은 것이다. 

 

건륭제는 일찍이 그녀를 황귀비로 승격시키고자 한것으로 보이나, 법적으로 황후가 생존해 있는 경우에 새롭게 황귀비의 직위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비는 건륭제의 두번째 황후인 계황후가 유폐된 후에 황귀비로 승격되어 육궁을 다스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효의순황후 위가씨는 당시 힘이 없던 한족 출신이었는데 49세의 나이로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병사설, 독살설 등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녀의 사인은 1928년 황실 무덤이 도굴당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뼈가 발견되며 실체를 드러내었다. 사망한지 150여년이 흘렀으나 그녀의 뼈에는 많은 독소가 포함되어 있어 썩지 않았던 것이다. 성분 검사결과 그 독소는 황화수은이었다. 추측하기로는 보잘 것 없는 한족 출신이었던 효의순황후 위가씨가 건륭제의 사랑을 받아 황귀비의 자리에게 까지 올랐으니 독살을 당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말이 있기는 하다. 

 

이상으로 건륭제와 효의순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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