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와, 무너진 하늘을 꿰메다

글·사진 김쓰
혼돈의 초기 시대, 중국 신화의 세계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시작된다. 하늘과 땅은 어떻게 분리되었고, 언제부터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살게 되었을까. 이 물음 앞에서 고대의 사상가들은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했다. 누군가는 영원히 하늘을 받쳐야 한다는 것. 그 누군가의 이름은 여와였다.
여와는 단순한 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인류의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구원자였다. <회남자>의 기록에 따르면, 여와는 자신의 손으로 황토를 빚어 인간을 만들었다. 먼저 손으로 정성껏 빚어낸 사람들은 귀족이 되었고, 시간이 부족해진 여와는 밧줄을 진흙에 담가 끌어당기며 대량으로 만들어낸 사람들은 평민이 되었다. 신화 속 이 섬세한 표현은 실은 모성의 절박함과 책임감의 무게를 이야기하고 있다.
천지 창조의 그 첫 번째 기적 이후, 여와는 또 다른 거대한 운명을 마주하게 된다.
외로움 속에서 탄생한 모성 - 여와, 인류를 빚다
광활한 원시의 대지에서, 홀로 남겨진 신이 있었다.
천지가 나뉘었을 때, 여와는 그 거대한 공허를 견디어야 했다. 하늘과 땅 사이의 무한한 공간에서, 자신의 형제이자 동반자인 복희와 함께였지만, 여와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종류의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과 같은 존재를 원하는 감정이었다. 신과 신만의 세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닮은 형상의 존재들과 함께 살고 싶었던 절절한 바람. 그것이 여와를 움직였다.
<초사>의 <천문>에서 굴원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여와는 황토를 물에 빠뜨려 진흙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진흙을 손으로 치대고 주물렀다. 그 과정이 얼마나 오랜 시간이었는지, 얼마나 절박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지만, 우리는 그녀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자신과 닮은, 자신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갈 누군가를 만들고 싶었던 절절한 바람.
<회남자>에서는 이를 더욱 상세히 기술한다. 여와가 만든 첫 번째 사람들은 모두 손으로 정성껏 빚어졌다. 한 명, 한 명, 그녀의 손가락이 스치고 그녀의 눈길이 닿은 인간들. 이들은 귀족이 되었다. 왜냐하면 신의 손이 직접 만져진 존재들이기 때문이었다. 각각의 인간이 조각상이 되기 전에, 여와의 신성함이 그들 하나하나에 각인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여와는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는 이 거대한 대지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손으로 만드는 속도는 한계가 있었다. 그 무한한 대지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때 여와가 취한 방법은 우리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밧줄을 가져다 진흙에 담갔다. 그리고 그것을 힘껏 끌어당겼다. 밧줄 자국을 따라 흙이 떨어져 나갔다. 기계적이고,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들의 대다수'는 평민이 되었다. 완벽함 없이, 신의 직접 손길이 미치지 않은 채로 탄생한 사람들.
Q: 왜 여와는 모든 인간을 손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A: 이것은 고대 중국이 정당화하고자 했던 신분제의 근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현실과 이상의 타협을 나타낸다. 여와도 완벽할 수 없었다. 모성은 제한적이고, 신의 사랑도 비례할 수 없다는 진실. 이것이 신화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이야기였을 수도 있다.
여와의 손을 거쳐 인류는 탄생했다. 그것이 불완전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현실의 인류였다. 완벽함을 포기한 자리에 실존이 자리하게 되었다.
신들의 싸움, 세상을 덮다 - 공공과 축융의 전쟁
그러나 모든 신화가 순탄하게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여와가 인류를 빚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들이 이 대지 위에서 살아가기 시작하던 그때, 하늘 위에서 거대한 싸움이 벌어졌다. 공공과 축융. 이 두신의 이름을 처음 들으면, 그들이 왜 싸웠는지 묻게 된다. <회남자>의 기록에 따르면, 이는 권력 다툼이었다. 천계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신들의 전쟁. 물의 능력을 가진 공공과 불의 능력을 가진 축융, 이 두 신이 대우주의 최고 권력을 두고 격력하게 맞부딪혔던 것이었다.
공공은 물의 신이었다. 불을 다루는 축융과의 싸움에서 공공은 자신이 진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절망의 순간, 공공은 최후의 방법을 택했다. 그는 부주산에 자신의 머리를 내팽겨쳤다. 부주산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었다. <회남자>와 <산해경>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그것은 하늘을 받치는 네 개의 거대한 기둥 중 하나였다. 천지의 구조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가장 근본적인 지탱점. 우주의 축 자체.
공공의 분노한 머리가 그 기둥을 부딪혔을 때, 일어난 일은 파국이었다. 하늘이 반으로 갈라져 떨어져 나갔다. 기록은 계속된다. 땅이 갈라졌다. 천지의 축이 남동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늘은 북서쪽으로 솟아올랐다. 이것이 오늘날 중국의 지리 특징을 설명한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대부분의 강들이 남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 신화가 자연의 형상을 설명하는 방식이 얼마나 정교한가.
그러나 지리학적 설명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당시 세상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야생동물들이 난리쳤다.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그리고 대지의 균열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넘쳐나는 물이었다. 신화 속 표현은 다음과 같다. "사나운 짐승들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먹어치웠고, 사냥꾼의 새들이 노인과 약자들을 집어채갔다." 그리고 "물은 광활하게 넘쳐났으며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상은 두 신의 싸움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여와가 마주하게 될 장면이었다. 자신이 손으로 만든 인류가 죽어가고 있었다.
Q: 왜 신화에서는 신들의 싸움으로 인한 재앙을 그렇게 자세히 묘사했을까?
A: 고대의 철학자들은 이 신화를 통해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것은 "권력의 다툼은 무고한 자들의 고통을 초래한다"는 원초적 진실이었다. 공공의 절망, 축융의 승리, 그리고 그 사이에서 죽어가는 무수한 인간들. 신화는 정치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있던 것이다.
이 순간, 인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들을 만든 신도 함께였다. 그리고 그 신은 무언가를 결심했을 것이다.
오색 돌의 기적 - 여와보천
이제 여와가 움직였다.
무너진 세상 앞에서, 여와는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았다. 기록에 따르면, 여와는 강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동쪽으로, 남쪽으로, 서쪽으로, 북쪽으로. 그리고 그녀는 오색의 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빨강, 노랑, 파랑, 검정, 하양. 이 다섯 가지 색은 단순한 색상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중국 철학의 중추인 오행 - 목화토금수를 상징했다. 우주의 기본 요소들. 자연의 근본 질서 자체. 여와는 우주의 기본 질서를 한데 모으고 있었다.
여와는 이 돌들을 모았다. 얼마나 먼 거리를 걸었는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는 기록되지 않지만, 우리는 그 과정의 절박함을 상상할 수 있다. 자신이 만든 인류가 죽어가고 있는데, 돌을 하나하나씩 모아야 하는 신의 고통. 그 여정이 얼마나 길었을까. 그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모든 돌이 모아졌을 때, 여와는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그녀는 이 돌들을 불에 녹였다. <회남자>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여와가 오색의 돌들을 녹여서..." 이것이 얼마나 거대한 불이었을지, 그 불이 얼마나 뜨거웠을지는 상상만으로 경탄스럽다. 이 녹아내린 돌은 일반적인 용액이 아니었다. 기록의 맥락상, 그것은 하늘을 메우기 위한 신성한 재료였다. 그리고 여와는 이것을 가지고 무너진 하늘의 구멍들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상상해보라. 거대한 구멍이 나있는 하늘 위에서, 여와가 오색의 녹아낸 돌을 붓고 있다. 하늘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처럼, 조용하고 집중된 손길로. 그 순간, 하늘이 다시 색을 갖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의 하늘에는 구름이 오색으로 물들어 있다고 고대의 사상가들은 말했다. 그것은 바로 여와의 손길이 남긴 흔적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완벽하지 않았다.
Q: 여와는 정말 완벽하게 하늘을 고쳤을까?
A: 아니었다. <회남자>는 한 가지 중요한 세부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여와가 한 일은 기적이었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기적이었다는 것. 여와가 모든 구멍을 다 메우지 못했거나, 혹은 완벽하게 수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현재까지도 자연재해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고대의 사상가들은 해석했을 수도 있다.
이것이 신화의 깊이다. 신도 완벽할 수 없다는 인간적 진실. 신조차 현실의 한계를 마주한다는 것.
여와보천. 이 고사성어는 나중에 한자 문화권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냈을 때" 쓰는 표현이 되었다. 하지만 그 어원은 단순한 승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절박함 속에서 최선을 다한 노력의 이야기였다. 불완전함을 알면서도 계속되는 헌신의 이야기. 여와의 손이 푸른 하늘을 만지던 그 순간, 세상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거대한 거북의 발 - 네 개의 기둥이 되다
그러나 하늘을 다시 메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무너진 하늘을 오색 돌로 메웠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있었다. 하늘과 땅을 지탱하는 기둥들을 다시 세워야 했다. 공공이 부주산에 머리를 부딪혔을 때, 네 개의 거대한 기둥 중 하나가 무너졌다. 이제 여와는 새로운 기둥을 찾아야 했다.
여기서 중국 신화의 가장 신비로운 장면이 탄생한다. <회남자>의 기록에 따르면, 여와는 "위대한 거북"을 찾았다. 그것이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 어떻게 찾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 여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여와는 바다에 들어갔을 것이다. 깊은 바다 속으로. 그곳에서 이 거대한 거북을 찾아야 했다.
거북은 중국 우주론에서 무엇인가. 그것은 "대지의 기둥",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신성한 생물이었다. 네 발을 가진 거북은 동양의 우주관 속에서 네 방위를 지탱하는 존재였다. 거북의 등은 하늘을 나타내고, 거북의 배는 땅을 나타낸다고 믿어졌다. 그런 거북이 바다 깊숙한 곳에서 세상을 받치고 있었다.
여와는 이 거대한 거북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의 네 개의 다리를 자르기로 결단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결정인지를 상상해보라. 거기에는 윤리적 딜레마가 있었을 것이다. 한 생명을 희생해서 세상을 구하는 것. 그것도 우주의 중심이라고 여겨지는 신성한 생물을. 하지만 여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이 만든 인류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여와는 거북의 네 다리를 잘라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네 방향에 세웠다. 동쪽에 하나, 서쪽에 하나, 남쪽에 하나, 북쪽에 하나. <회남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네 개의 기둥이 다시 세워졌고, 천지가 기울어진 상태로 안정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있다. "기울어진 상태로". 이것은 신화가 현실과 타협했다는 뜻이다. 완벽하게 수평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불완전하지만 지탱할 수 있는 상태.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상이다. 우주는 여전히 조금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다.
Q: 왜 신화에서는 거북을 선택했을까? 다른 동물은 안 되었을까?
A: 거북은 중국 문화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장수와 지혜, 그리고 우주의 중심을 상징한다. 또한 거북은 물을 다루는 생물이면서 동시에 땅에 머문다. 하늘과 땅의 중간에 있는 생물. 무너진 세상을 다시 연결하기 위해서는 이런 의미의 생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거북의 껍질은 하늘의 돔을 상징하고, 거북의 네 발은 땅의 네 기둥을 상징한다. 거북보다 더 완벽한 상징이 있을 수 없었다.
여와가 거대한 거북의 네 다리를 기둥으로 세웠을 때, 세상은 비틀렸지만 다시 일어섰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계속되었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 되었다.
마지막 전투 - 흑룡을 죽이고 갈대를 태우다
하늘과 대지의 기둥이 다시 세워졌을 때, 여와는 더 이상 남은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가장 위험한 위협은 아직도 세상을 삼키고 있었다. 물이다. 공공의 반란으로 생긴 대지의 균열에서 솟아나온 물은 여전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강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 전체를 집어삼킬 수 있는 거대한 홍수였다. 사람들은 물에 잠겼다. 집들은 물에 떠내려갔다. 저지대는 모두 물의 왕국이 되어버렸다.
<회남자>와 <산해경>의 기록을 종합하면, 여와는 또 다른 적을 마주하게 된다. 흑룡. 물의 정령이자 홍수 자체의 화신. 이 흑룡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의 원초적 힘의 의인화였다. 공공의 물의 능력이 응축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지성이 있는 존재였다. 계획 있는 파괴자였다.
여기서 신화는 가장 극적인 장면을 편친다. 여와와 흑룡이 맞닥뜨렸을 때, 무엇이 일어났는가. 기록은 명확하지 않지만, 표현은 강렬하다. 여와가 흑룡을 죽였다. 이것이 얼마나 큰 행동인지를 생각해보라. 신과 신의 직접적인 대전. 물의 정령을 죽이는 행위. 이것은 이전의 돌 모으기나 기둥 세우기와는 다른 차원의 행동이었다. 이것은 전쟁이었다. 여와의 마지막 전쟁.
흑룡을 죽인 여와는 마지막 수단을 취했다. 그것은 현대의 우리에게는 놀라운 방법이다. 그녀는 갈대를 태웠다. <회남자>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갈대와 재를 모아 홍수를 막았다." 여와는 강가의 갈대들을 모았다. 말라 있는 갈대들. 그것을 불태웠다. 갈대를 태우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불타는 갈대의 재가 물을 흡수하고 통제한다는 의미였을 수도 있다. 혹은 그것이 자연 현상의 상징일 수도 있다. 수증기, 증발, 자연의 순환. 어쨌든, 이 행위로 인해 홍수가 물러났다. 물이 점점 줄어들었다. 대지가 다시 드러났다. 생명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여와의 모든 행동이 끝난 후, 기록은 한 가지를 덧붙인다. "여와의 생명력이 거의 소진되었다." 이것이 신화의 끝이 아니라, 그녀의 희생의 크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류를 만들고, 하늘을 메우고, 기둥을 세우고, 흑룡과 싸우고, 갈대를 태운 모든 행동은 그녀의 생명 자체를 소모하는 것이었다. 각각의 행동마다 그녀의 신성한 힘이 소비되었다. 마지막 행동을 마칠 때, 그녀는 거의 에너지가 남지 않은 상태였을 것이다.
Q: 왜 신화는 여와의 죽음을 명확히 기록하지 않았을까?
A: 신화의 가장 깊은 의미는 종종 말해지지 않은 것에 있다. 여와의 죽음을 명확히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행동이 계속된다는 의미일 수 있다. 하늘은 그녀가 메웠고, 기둥은 그녀가 세웠고, 홍수는 그녀가 막았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생명력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뜻.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자체가 여와의 연속된 희생일 수 있다는 것. 그녀는 죽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 자체가 되었다.
세상이 평온해졌을 때, 여와는 어디에 있었을까. 기록은 침묵한다. 하지만 하늘 위에서, 우리의 위에서, 그녀의 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에필로그 - 무너진 세상을 다시 세운 신의 손
오늘날 우리는 이 신화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여와의 이야기는 단순한 신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고대의 답변이다. 왜 세상은 완벽하지 않은가. 왜 재해가 있는가. 왜 우리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가. 그 질문 앞에서, 고대의 중국 철학자들은 한 가지 진리를 제시했다. 완벽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고, 그 현실 속에서도 누군가는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
여와는 인류를 만들었다. 하지만 완벽한 인류가 아니라, 손길이 미치지 않아 불완전한 인류를 만들었다. 여와는 하늘을 메웠다. 하지만 완벽하게 메우지 못한 하늘을 메웠다. 여와는 기둥을 세웠다. 하지만 기울어진 채로 지탱하는 기둥을 세웠다. 여와는 홍수를 막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명 대부분을 소모했다. 이 모든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의 세상은 계속되고 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당신을 지탱하고 있는 무언의 기둥이 있지 않은가. 당신을 만든 것, 당신을 구원한 것, 당신의 고통을 덜어준 것들. 그것들이 바로 현대의 여와인 것이다. 당신의 부모의 희생, 당신의 친구의 위로, 당신의 선생님의 가르침, 이 모든 것들이 당신의 세상을 받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꿰맨 여신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단순히 고대의 신화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너진 세상을 다시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믿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 믿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