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탐과 소르합, 페르시아 영웅의 운명 - 샤나메를 읽다

글·사진 김쓰
먼 옛날 페르시아의 광활한 대지에서 한 남자가 태어났다. 그는 사자처럼 맹렬했고, 낙타처럼 키가 크고, 코끼리처럼 힘이 셌다. 그의 이름은 루스탐. 그리고 그 주변에는 언제나 진홍색의 명마 라크시가 함께했다.
이것은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다. 1000년 전 페르시아의 위대한 시인 페르도시가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기록한 <샤나메(왕의 서)>에 담긴 영웅의 이야기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 그리고 북유럽의 <니벨룽겐의 노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 서사시는 단순히 과거의 영웅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 맞닥뜨려야 할 보편적인 고뇌들을 담고 있다. 루스탐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우리는 영웅이 무엇인지, 그리고 강함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페르도시 - 민족의 영혼을 펜에 담은 사람
33년의 투혼, 한 권의 서사시로 완성되다
페르시아 시인 아불-카셈 페르도시(Abul-Qasem Ferdowsi)는 약 935년경 이란 투스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생 한 가지 일에만 집중했다. 바로 이 대작의 완성이었다.
977년부터 1010년까지, 무려 33년에 걸쳐 페르도시는 약 6만 개의 쌍을 이루는 페르시아 시(couplet)를 완성했다. 매일매일 펼쳐진 종이 위에 전 민족의 역사와 신화를 담아냈다. 그것도 아랍 정복 이후 페르시아어 자체가 위기에 처한 시대에 말이다. 한 줄 한 줄이 얼마나 지난한 결정이었을지, 우리는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멈추지 않았다.
Q: 페르도시는 왜 33년이라는 긴 시간을 저술에만 바쳤을까?
A: 이는 순수한 예술적 열정뿐만 아니라 민족적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7세기 이슬람 정복 이후 페르시아는 아랍 문명에 흡수되고 있었다. 조로아스터교 경전인 <아베스타>의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고대 이란의 고유한 문화와 신화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페르도시가 기록하지 않았다면, 루스탐이라는 영웅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묻혀갔을 것이다. 이것이 시인을 움직인 진정한 동력이었다.
후원자와의 비극적 만남 - 예술가의 숙명
흥미로운 것은 이 저작이 완성되는 과정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는 점이다. 처음 페르도시를 후원한 것은 사만 왕조의 술탄이었다. 그러나 저술 도중 사만 왕조가 멸망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페르도시를 새로이 후원하게 된 것은 가즈니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였는데, 그는 다름 아닌 페르시아인들이 <샤나메>에서 악의 화신으로 묘사한 투란(Turan) 세력의 후예, 즉 튀르크인이었다. 투란을 야만인으로 폄하하는 서사시를 지원해야 했던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는 짐작할 수 없지만, 과시욕 강한 술탄은 이 대작을 완성하도록 후원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생을 바친 저작이 완성되었을 때, 마흐무드 술탄은 약속했던 금화 대신 같은 무게의 은화를 지불했다. 또한 여러 기록에 따르면, 페르도시가 완성 후 얼마 뒤 마흐무드가 은화를 가득 실은 코끼리를 보냈지만, 이미 전 생애를 바친 작품이 푸대접받았다는 상실감으로 홧병이 나 죽어 있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비록 나중에 마흐무드가 금화를 다시 보냈으나, 위대한 시인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뒤였다. 영원한 고전을 남긴 예술가의 마지막은 경제적 보상으로부터 비극적으로 단절되었다.
영웅의 시련 - 일곱 가지 여정이 담은 의미
명마 라크시와의 만남 - 진정한 동반자
이 서사시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한 마리의 말이 등장한다. 그 말의 이름은 라크시(Rakhsh)였다. '라크시'는 페르시아어로 '광명'이나 '번개'를 뜻하는 이름이다.
루스탐은 어려서부터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어떤 말도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그때 영웅은 일마리의 특별한 망아지를 만난다. 그 망아지는 사자처럼 용맹했고, 낙타처럼 우아했으며, 코끼리처럼 강력했다. 루스탐은 그 말을 '라크시'라 이름 지었다.
라크시는 단순한 탈것이 아니었다. 영웅이 잠들어 있을 때 사자가 나타나면 라크시가 발굽으로 사자를 걷어찬다. 루스탐이 위기에 처하면 라크시가 울음을 질러 그를 깨운다. 이 둘의 관계는 영웅 서사시에서 드물게 등장하는 진정한 우정과 믿음의 상징이다. 라크시는 결코 주인공을 배반하지 않으며, 루스탐도 라크시를 깊이 신뢰한다. 이 순수한 신뢰의 관계야말로 모든 영웅의 모험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칠난도의 일곱 가지 시련
영웅이 마잔다란 왕국으로 떠나는 길은 칠난도(Seven Labors)라는 이름의 위험한 도로였다. 이 길에서 루스탐은 일곱 가지 시련을 맞닥뜨린다.
첫째, 사자와의 대면 - 잠에서 깨어난 영웅이 마주한 것은 거대한 사자였다. 라크시가 깨우지 않았다면 루스탐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는 영웅에게도 죽음이 언제나 곁에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둘째, 사막 횡단 - 칠난도 사막을 지나는 고행. 이는 영웅이 단순한 물리적 힘을 넘어 정신적 인내를 갖춰야 함을 상징한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루스탐도 자연의 무한함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
셋째, 용과의 전투 - 가장 유명한 시련이다. 루스탐이 깊은 수면에 빠져 있을 때 용이 나타난다. 라크시가 울음을 질러 깨운 영웅은 용과 벌이는 격렬한 전투 끝에 검으로 용을 관통시킨다. 이 장면은 페르시아 미니어처 화법의 고전적 소재가 되었으며, 무수한 삽화 속에서 루스탐의 영웅성을 상징하는 대표 장면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미니어처들 속에서 우리는 천 년 전 시인이 본 영웅의 모습을 그대로 만날 수 있다.
넷째, 마녀의 음모 - 루스탐 앞에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는 마녀다. 영웅이 신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순간 마녀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루스탐은 밧줄을 던져 마녀를 포박한 후 검으로 양단한다. 이는 외모의 유혹을 넘어 진실을 꿰뚫는 영웅의 지혜를 보여준다.
다섯째, 말 주인의 처벌 - 루스탐과 라크시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라크시가 신경과민으로 농작물을 짓밟는다. 이를 본 농민들이 욕을 퍼붓자, 영웅은 몸을 사리지 않고 그들을 제압한다. 강함도 때로는 비극을 만든다는 역설이 여기 담겨 있다. 루스탐은 자신의 힘을 통제하려 노력하지만, 분노하는 순간 그 힘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다.
여섯째, 악마 디브의 격퇴 - 또 다른 악마와의 전투가 벌어진다. 이 악마는 강력한 마법을 지니고 있었다. 루스탐과의 치열한 격투 끝에 악마는 패배한다.
일곱째, 하얀 악마 드브-에-세피드의 소멸 - 마지막 시련은 가장 강력한 악마, 하얀 악마와의 대면이다. 이 악마는 미잔다란을 정복한 절대적 존재였다. 루스탐도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었으나, 곧 용기를 내어 피튀기는 싸움을 벌인다. 영웅이 하얀 악마를 물리치자, 악마의 심장에서 나온 피로 마잔다란 사람들의 시력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악마의 머리는 루스탐의 투구가 되었다.
이 일곱 가지 시련은 단순한 물리적 전투가 아니다. 사자는 두려움, 사막은 절망, 용은 절대적 위협, 마녀는 유혹, 악마들은 윤리적 시련을 상징한다. 루스탐이 이 모든 것을 통과할 때마다, 영웅은 단순한 무술의 달인이 아니라 영혼의 기사로 성숙해간다.
운명의 비극 - 아버지와 아들의 피할 수 없는 만남
한 번의 잠에서 비롯된 평생의 비극
이 서사시에서 가장 애절한 장면은 루스탐의 모험담이 아니라 그의 감춰진 과거다. 영웅이 마잔다란에서의 시련을 극복한 후, 그곳에서 만난 왕의 딸 타흐미나와의 한 밤의 사랑. 그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타흐미나 공주는 루스탐의 강함과 용기에 반했다. 두 사람은 한 밤을 함께했고, 루스탐은 공주에게 아주르(팔찌)를 선물로 남기고 떠났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타흐미나는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소르합이다.
소르합은 아버지를 닮아 자라났다. 사자처럼 용맹했고, 투란 왕국의 가장 뛰어난 전사가 되었다. 아버지를 찾는 원념 속에서 성장했다. 한번은 아버지를 만나겠노라는 열망만이 아들을 움직였다. 어머니가 "팔찌를 가지고 있으니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줄 때, 소르합의 눈빛은 더욱 반짝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열망은 가장 비극적인 형태로 실현되었다.
미지의 상대와의 전투 - 두 영혼의 충돌
어느 날 한 국가의 군대와 다른 국가의 군대가 전쟁터에서 마주쳤다. 페르시아군을 이끈 것은 루스탐이었다. 그리고 투란군의 최고 전사는 자신도 모르는 아버지를 꺼내기 위해 결투를 신청한다. 그것이 소르합이었다.
전장의 먼지 속에서 두 영웅이 마주친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아버지는 저 청년이 자신의 아들인 줄 모르고, 아들은 저 거한이 자신의 아버지인 줄 모른다. 그들은 단지 두 명의 전사일 뿐이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상대가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싸움은 치열했다. 무술의 경지에서 미세한 차이가 벌어진다. 루스탐은 경험에서 우위를 점했고, 결국 소르합을 마지막 일격으로 쓰러뜨린다. 죽어가는 아들을 유혹해서 투구와 갑옷을 벗기는 루스탐. 그 순간, 영웅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이 예전에 타흐미나 공주에게 줬던 팔찌다. 손가락에 차여 있는 그 아주르를.
아, 이 남자가.
루스탐의 외침이 전장에 울려 퍼진다. 영웅이 안고 있는 것은 아버지에게 죽음을 당한 아들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영혼이 죽어버린 아버지 자신이었다. 팔찌를 움켜쥔 손은 점점 떨려오고,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최고의 영웅 루스탐은 그 순간 가장 약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Q: 왜 루스탐과 소르합의 비극은 호메로스의 일라아스도 담지 못한 그토록 심오한 감정을 불러일으킬까?
A: 이는 비극이 '운명의 불가피성'과 '인간의 무력함'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대개 자신의 위대함 속에서 좌절을 맞이한다. 하지만 루스탐과 소르합의 이야기는 다르다. 여기서 비극의 근원은 영웅의 오만이 아니라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우주적 운명이다. 또한 현대의 독자가 이 이야기에 공감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고전적 비극이 아니라 전쟁 속 가족 단절, 소통의 부재, 그리고 영원한 후회라는 보편적 아픔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의 반복 - 역사 속의 무한 순환
더욱 심오한 것은, 이 비극이 루스탐에게만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르합의 죽음 이후에도, 루스탐은 계속해서 페르시아의 왕들을 섬기며 전투를 벌인다. 그는 또 다른 전사들을 죽인다. 혹시 그들도 누군가의 아들이 아닐까? 영웅이 매 일격 속에 이제는 의심이 스며든다.
이것이 이 서사시가 단순한 영웅담이 아닌 이유다. 이는 영웅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 그리고 강함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철학적 서사시다.
조로아스터교의 우주관이 만든 영웅상
선과 악의 우주적 투쟁 속의 인간
이 서사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배경이 되는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우주관을 알아야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이란 문명이 생산해낸 가장 오래된 일신교며, 2500년 전의 종교사상이다.
조로아스터교의 핵심은 '이원론'이다. 우주는 선의 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와 악의 신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 사이의 영원한 투쟁의 장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투쟁의 결말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선이 악을 이기겠지만, 그 때까지는 우주는 항상 전쟁 상태에 있다. 그리고 이 우주적 투쟁 속에서 인간의 선택과 행동이 의미를 갖는다.
루스탐은 바로 이 종교적 우주관 속의 인간이다. 영웅은 악을 물리쳐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행동이 선인지 악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용을 죽이는 것은 정의인가? 마녀를 양단하는 것이 옳은가? 그리고 아들을 죽인 자신은 선의 편인가 악의 편인가?
도덕적 갈등의 원천 - 절대적 진리의 부재
이 서사시의 루스탐이 호메로스의 아킬레우스나 오디세우스와 다른 점은, 영웅이 보이는 끊임없는 도덕적 갈등이다. 루스탐은 강하지만 불안하다. 정의를 위해 싸우지만, 때로는 그 정의가 진정한 정의인지 의심한다.
이것이 바로 조로아스터교적 우주관의 영향이다.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되는 이상적 우주가 아니라, 현실의 우주 속에서 인간이 지속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이 루스탐의 영혼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이란 문명의 정신적 기반
조로아스터교는 또한 이란 문명의 기초를 이루었다. 페르세폴리스의 아케메네스 제국, 사산 왕조, 모두가 이 종교를 국교로 삼았다. 사막 지대에 우뚝 선 나크시-에 로스탐 유적(Naqsh-e Rostam) 바위산에는 조로아스터교 황제들의 무덤과 부조가 남아 있다. 흥미롭게도 이 유적의 이름 자체가 '로스탐의 조각'이라는 뜻이다. 현실의 산 자체가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현대에도 이란의 야즈드에는 조로아스터교 신도 약 4만 5천 명이 살고 있으며, 인도의 봄베이에는 인도 이민족인 파르시(Parsi)들 약 8만여 명이 이 신앙을 지키고 있다. 2500년의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그들이 지키는 불의 사원에는 영원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바로 이 불이, 조로아스터교 신도들이 본 선과 악의 우주적 투쟁을 상징한다.
페르도시 - 민족 언어의 보존자
아랍화의 물결 속에서 지켜낸 것
10세기 이슬람 정복 이후, 페르시아는 문화적 위기 속에 있었다. 아랍어가 지배 언어가 되면서 페르시아어는 점점 잊혀져 가고 있었다. 조로아스터교 경전 <아베스타>는 이미 대부분 소실되었고, 고대 이란의 신화는 전승자들의 입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언어가 사라지면 그 언어가 담던 세계도 사라진다. 이것이 문화적 죽음이다.
페르도시가 이 저작을 완성한 것은 단순한 문학 작품의 탄생이 아니라 한 민족의 영혼을 보존하는 행위였다. 시인의 펜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면, 루스탐이라는 영웅은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란이라는 민족 정체성도 아랍 문명 속에 완전히 용해되었을 수도 있다. 페르도시는 한 개인의 창작자가 아니라 민족 전체의 기억을 지킨 수호자였던 것이다.
창작의 정신 - 신화의 재해석
흥미로운 점은 페르도시가 단순히 전승된 이야기를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인은 창작의 정신으로 신화를 재해석했다.
사산 왕조 시대에 창작된 원래의 이란 신화는 황실의 권위를 자랑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왕들은 모두 위대하고, 신들은 항상 도움을 주고, 영웅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정의로웠다. 그러나 페르도시의 이 저작에서는 왕들도 어리석고, 영웅도 실수를 한다. 때로는 영웅의 선택이 전쟁을 불러오고, 왕의 판단이 민족의 비극을 만든다.
루스탐이 아들을 죽인다. 왕들이 현명하지 못한 결정을 내린다. 투란이라는 '악'도 실제로는 모순과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나라다. 이것이 페르도시라는 개별 창작자가 제시한 신화의 '인간화'다. 그리고 여기에 이 저작이 천년 이후의 현대 독자들도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영웅정신과 현대의 리더십
강함의 책임성 - 영웅으로부터 배우는 것
이 서사시가 말해주는 첫 번째 메시지는 강함이란 책임이라는 것이다. 루스탐은 무비무적이지만, 그 강함이 가져온 결과들을 항상 짊어져야 한다. 아들을 죽인다. 농민들을 죽인다. 그가 물리친 악들도 어쩌면 누군가의 아버지이거나 아들이었을 수도 있다.
이것은 현대의 리더십에서 놀랍도록 유효한 메시지다. 조직의 리더, 정치의 중심에 있는 자들. 그들의 결정은 누군가의 생명과 미래를 좌우한다. 루스탐과 소르합의 비극은 그 책임감을 깨닫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다. 진정한 리더는 자신의 영향력이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항상 자각해야 한다.
의심의 정신 - 진리를 향한 탐구
두 번째는 의심하는 정신이다. 루스탐은 자신의 행동이 정의인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이것이 바로 조로아스터교가 가진 종교적 지혜가 인간의 영혼에 남긴 흔적이다.
교육 현장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가정에서도 우리는 너무 쉽게 "이것이 옳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루스탐의 예를 통해 우리는 배운다. 가장 강한 자일수록 가장 많이 의심해야 한다는 것을. 가장 확신 있는 결정일수록 그것을 다시 한 번 되묻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동양 철학과 서방 영웅주의의 만남
페르시아의 영웅 루스탐은 그리스의 영웅들과는 다르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위대함에 도취되고, 오디세우스는 제국의 건설을 꿈꾼다. 그러나 루스탐은 다르다. 영웅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동양 철학의 영향을 받은 이란 문명의 특성이다. 중국의 도나 인도의 카르마(업)라는 개념과 조로아스터교의 책임 윤리가 만나, 페르도시의 서사시 속에서 독특한 형태의 영웅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영웅을 현대 컨텍스트 속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 변화무상한 세상 속에서, 우리 모두가 때로는 루스탐이 되고, 때로는 소르합이 된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서사시는 천년의 지혜로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결론 - 영원한 물음, 영원한 응답
인간의 운명과 그 초월
우리는 이제 페르도시의 집필실을 떠나야 한다. 그 집필실에서 33년 동안 매일 펼쳐진 종이에 적혔던 6만 개의 쌍들을. 그리고 우리는 또한 루스탐과 라크시가 함께 걸었던 칠난도 사막, 그들이 맞닥뜨렸던 일곱 가지 시련, 그리고 루스탐이 소르합의 팔찌를 발견했을 그 순간의 비극을 뒤로 하고 나와야 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일 우리가 누군가와 대면할 때, 혹시 그 사람이 우리의 아버지나 아들은 아닐까? 내일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아닐까? 내일 우리가 의심 없이 행한 정의가 실제로는 폭력은 아닐까?
이 물음들이 루스탐의 이야기가 우리 영혼 속에 영원히 남기는 것들이다.
시대를 초월한 비극의 보편성
전쟁과 평화, 영웅과 나약함, 사랑과 증오. 이 모든 것을 담은 이 서사시는 단순한 고대 동양의 신화가 아니다. 그것은 현대의 우리가 영화와 드라마, 소설과 시를 통해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이야기들의 원형(archetype)이다.
루스탐의 일곱 가지 시련은 현대인이 맞닥뜨리는 심리적 갈등의 메타포다. 소르합과의 비극은 소통 부재의 시대에 우리가 겪는 가족 간의 단절을 1000년 전에 미리 그려낸 것이다. 페르도시의 33년 투혼은 문화를 보존하려는 현대 역사가들의 사명감과 정확하게 만난다.
마지막에 남기는 것
이 서사시는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이야기다. 루스탐처럼 우리도 강함과 약함 사이를 오간다. 페르도시처럼 우리도 무언가를 기록하고 보존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모두 소르합처럼 누군가를 찾고 있으면서, 동시에 루스탐처럼 누군가를 부르고 있다.
천년 전 이란의 대지에서 펼쳐진 이 서사시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의 거리는 소멸한다. 우리는 루스탐이 되고, 우리는 소르합이 되고, 우리는 페르도시가 되어, 인류의 영혼이 담은 이야기를 함께 들려준다.
이것이 고전이 고전인 이유다. 이것이 천 년을 살아낸 이 서사시가 여전히 우리 영혼 속에서 울려 퍼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