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민족의 뿌리 - 용과 신선의 자손, 락 롱 꿘과 어우 꺼

글·사진 김쓰
베트남의 가장 오래된 땅 서사는 하나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하늘과 땅, 물과 흙, 용과 신선이라는 상반된 두 세계가 만나는 그 순간에서 하나의 민족이 탄생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오래된 기록들 속에 남겨진 베트남 건국 설화에 따르면, 바다의 용신 락 롱 꿘(Lac Long Quan)과 산의 신선 어우 꺼(Au Co)라는 두 존재가 있었다. 락 롱 꿘은 단순한 바다의 정령이 아니었다. 그는 용의 왕국을 다스리는 강력한 통치자이자 고대 베트남 대지의 첫 번째 진정한 왕으로 여겨진 인물이다. 한편 어우 꺼는 산 위에 홀로 살며 대자연의 신비를 품은 요정으로 기록된다.
어느 때부터인가 두 존재의 세계가 만나기 시작했다. 어우 꺼가 락 비엣의 전설적인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산을 내려왔을 때, 그곳에서 락 롱 꿘을 만났다. 민간 기록들에 따르면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이 혼인은 단순한 개인의 연애가 아닌 국가의 기원이자 민족 탄생의 시작이 되었다.
Q: 왜 베트남의 국가 기원 신화는 용과 산신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하는가?
A: 용은 물을 상징하고, 신선은 산을 상징한다. 고대 베트남 사람들에게 이 둘의 만남은 해안의 비옥한 들판과 산악 지역의 풍요로움이 하나로 합쳐진다는 의미였다. 즉, 서로 다른 두 환경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강한 문명을 만드는 과정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00개의 알에서 태어난 100명의 아들
어우 꺼가 임신했을 때, 베트남 대지 위에는 신성한 예감이 감돌았다. 오랜 세월을 기다려온 끝에, 드디어 그날이 찾아왔다. 어우 꺼는 일반적인 아이들을 낳지 않았다. 그녀는 100개의 알이 담긴 주머니를 낳았고, 그 주머니에서 100명의 강하고 찬란한 아들들이 태어났다.
역사 기록인 <Dai Viet Su ky toan thu>(대월사기전서, 1479년 완성)에 따르면, 이 아들들은 부모의 특징을 모두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용다운 기품과 어머니의 신선 같은 우아함을 동시에 지닌,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으며, 지능과 힘 모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왜 100인가? 이 숫자는 단순히 많은 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대 베트남 지역에는 수많은 부족과 소규모 정치 단위들이 공존했다. 기원전 2879년경, 당시의 세력가 킹 듀엉 브엉(Kinh Duong Vuong)은 여러 부족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이 통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족이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조상 신화가 필요했다. 100명의 아들이 바로 그것이다.
100은 당시의 베트남 영토에 존재하던 '100개의 부족' 또는 '백약(Bach Viet)'을 상징하며, 이들이 모두 같은 조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교육적으로도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교사나 학부모가 자녀에게 설명할 때, "이 숫자는 우리 베트남이 처음부터 여러 정치 단위가 하나로 모여 하나의 강한 민족을 이루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100명 중 가장 위대한 아들, 훙왕의 탄생과 반랑국 건국
어느 날 시간이 흘러, 그 100명의 형제들이 모두 성장했을 때가 왔다. 역사 기록과 민간 전설에 따르면, 어우 꺼는 아들들 중 가장 뛰어난 장자에게 기이한 제안을 했다. "아버지는 바다를 선택했고, 나는 산을 선택했노라. 그럼 너와 형제들도 나뉘어야 한다."
이 순간은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용의 아버지는 50명의 아들들을 이끌고 해안 지역(동해)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바다의 풍요로움을 터득하고 해양 문명을 발전시켰다. 한편, 산의 어머니 어우 꺼는 나머지 50명의 아들들을 이끌고 산악 지역으로 향했다. 그들은 산림의 자원을 활용하고 산지의 전통을 만들어갔다.
이 분리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역사학자들이 주목하는 바에 따르면, 이는 베트남의 지리적 다양성과 정치적 현실을 반영한 신화적 표현이다. 베트남은 해안 평야와 산악 지역이 공존하는 땅이었고, 두 문화권이 점차 통합되는 과정을 거쳤다. 어우 꺼와 락 롱 꿘의 분리는 그 과정의 필연성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반랑국은 어떻게 건국되었는가? 전설에 따르면, 어우 꺼를 따라 산으로 간 50명의 아들들 중 가장 뛰어난 첫째 아들이 훙왕이 되었다. 훙왕은 퓨 토 성의 퐁 챠우 지역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모든 형제들을 통합하여 역사상 베트남의 첫 번째 왕조인 반랑국을 건국했다. <대월사기전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 건국은 기원전 2879년경의 일이다.
Q: 훙왕이 왜 첫 번째 왕으로 선택되었을까?
A: 역사 기록에 따르면, 훙왕은 용의 아버지 락 롱 꿘의 피를 받아 강력한 지도력을 갖추었으면서도, 산신 어우 꺼의 피를 받아 대자연과의 조화를 이해하는 통찰력을 가진 존재였다. 그는 "용과 산의 혼합"으로서 완벽한 지도자의 상을 대표했다. 이것이 바로 베트남 역사에서 훙왕을 가장 추앙하는 이유이며, 음력 3월 10일 훙왕 기념일(Gio To Hung Vuong)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한 근거가 되었다.
반랑국의 역사와 18대 훙왕의 통치
훙왕 이후 베트남 역사는 18대의 훙왕들로 이어졌고, 반랑국은 약 2,600년에 걸쳐 동남아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 왕조로 존속했다. 이 기간 동안 훙왕들은 농경 문명을 발전시키고, 정치 제도를 정비하며, 주변 지역과의 관계를 구축했다. 반랑국의 통치자들은 "용과 산의 혼합"이라는 상징적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현실의 정치와 외교 문제들을 해결해나갔다.
반랑국은 결국 기원전 258년경 어린 왕 떠 팍(Thuc Phan, 또는 An Duong Vuong으로 더 알려진)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왕조인 오월(Au Lac)로 변모하게 된다. 하지만 오월 역시 그 건국자들이 반랑국의 정통성을 계승하려 했을 정도로, 훙왕 신화는 베트남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정신적 기초로 작용했다. 이는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니라, 같은 민족 정체성 속에서의 정치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용과 신선의 자손" - 베트남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다
<대월사기전서>가 1479년 완성되었을 때, 응오 시 리엔(Ngo Si Lien) 같은 역사가들은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들은 베트남의 국가 정체성 자체를 구성하려 했다. 상반된 두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민족 정체성으로 수렴하는가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현재 베트남은 54개의 공식적으로 인정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언어, 복장, 풍습이 모두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용과 신선의 자손"이라는 공통의 신화를 공유함으로써 하나의 국가로 존재한다.
2012년 유네스코는 "훙왕 숭배 신앙과 의례(Worship Belief and Ritual Practices of the Hung Kings)"를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유네스코는 이것이 "베트남 국민의 정신적 단결을 표현하고, 국가의 기원을 인정하며, 베트남 문화적·도덕적 정체성의 원천을 제공하는 전통"이라고 평가했다.
매년 음력 3월 10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전역 54개 성에서는 훙왕 기념일 축제가 열린다. 2016년에는 약 700만 명이 퓨 토 성의 훙왕 사원에 참배했다. 정부 고위 인사들이 먼저 발을 옮기고, 일반 국민들이 뒤따랐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한 국가의 모든 시민이 공동으로 느끼는 정체성의 확인 의식이었다.
우리가 물을 마실 때 그 출처를 기억해야 한다는 뜻의 베트남 속담 "마시는 물의 근원을 기억하라(Uong nuoc nho nguon)"는 훙왕 신화의 철학적 정수를 담고 있다. 현재의 베트남인 모두는 용과 신선의 피를 받은 그 100명의 아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의미이다.
Q: 왜 베트남 정부는 훙왕 기념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을까?
A: 베트남 같은 다민족 국가에서 국가 정체성은 매우 중요하다. 과거 내전으로 분열된 역사를 겪었던 베트남이 강력한 국가 정체성을 필요로 했다. 훙왕 신화는 54개 민족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되고 포용적인 "국가 기원 신화"로서 완벽했다. 따라서 음력 3월 10일 훙왕 기념일은 단순한 역사 기념일이 아니라, 국민 통합의 상징이 되었다.
역사와 신화의 경계에서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이것이 신화일 뿐 실제 역사가 아니지 않나?"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타당한 의문이다. 그러나 베트남 역사학자들은 중요한 점을 강조한다.
신화가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서구 역사학자인 라임 켈리(Liam C. Kelley) 같은 이들도 인정하듯이, 락 롱 꿘과 어우 꺼의 이야기는 14-15세기 중세 베트남의 지식인들이 당시의 정치적·문화적 필요성에 따라 정교하게 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현실을 신화적 형태로 응축해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현존하는 역사 기록들을 살펴보면
- <Dai Viet su ky toan thu>(대월사기전서) - 1479년 응오 시 리엔이 편찬한 베트남 최고(最古)의 공식 역사서. 락 롱 꿘과 어우 꺼의 신화를 정사의 첫 부분으로 기록했다.
- <Linh Nam chich quai>(영남적괴) - 14세기 후반 편성된 베트남 민간 설화집. 건국 설화들이 원본으로 기록되어 있다.
-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기록 - 2012년 "훙왕 숭배 신앙"의 무형문화유산 등재 결정 및 해제 문서.
- 한국 학술자료 - 배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의 논문 <베트남, 용과 신선의 자손들>(경제·인문사회 연구회, 2020)
이 모든 자료들은 락 롱 꿘과 어우 꺼의 신화가 단순한 민간 전설이 아니라, 베트남 역사 기록에 정식으로 포함된 건국 설화임을 보여준다.
결론 - 수천 년을 이어온 신화의 힘
우리가 락 롱 꿘과 어우 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베트남인들의 정체성 그 자체라는 점이다.
용은 강력함을, 신선은 지혜로움을, 산은 뿌리내린 안정을, 바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한다. 이 모든 것을 합쳐놓은 베트남의 이미지는 완벽한 국가 정체성이 될 수 있을 정도로 포괄적이고 아름답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이 신화가 2,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의 침략, 프랑스의 식민 지배, 내전의 상흔 속에서도 베트남 국민들은 훙왕 기념일을 지켜냈다. 심지어 남북으로 분단되었던 시절에도, 남과 북은 각각 훙왕 기념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다. 그만큼 강력한 정체성의 상징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