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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Korean History)/조선시대사(Joseon Dynasty)

이덕무, 조선 최고의 독서광이 우리에게 전하는 위로

by 김쓰 2025.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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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모습을 형상화해보았다

글, 사진 / 김쓰

 

햇살이 비스듬히 책장 사이로 스며드는 오후 나는 문득 조선시대 한 선비를 떠올린다. 손가락에 동상이 걸려도 책을 놓지 않았던 사람 겨울밤 얼어붙은 방에서 《한서》를 이불 삼아 덮고 《논어》로 문틈을 막았던 사람. 그는 스스로를 간서치(책만 보는 바보)라 불렀다.

 

 

병약한 몸, 외로운 영혼이 책에서 찾은 위로

 

이덕무(1741-1793)는 왕족의 후예였지만 서자의 서자로 태어나 평생 신분의 굴레에 갇혀 살았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고 5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 속에 자랐다. 양반도 평민도 아닌 경계인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책 읽는 것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고백했다. "방은 매우 작다. 하지만 동창, 남창, 서창이 있어 해가 동쪽에 있으면 동창 아래서 읽고, 서쪽으로 기울면 서창 아래서 빛을 받아 책을 읽었다." 하루 종일 햇빛을 따라 이동하며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 《청장관전서》중에서

 

무엇이 그를 이토록 책에 매달리게 했을까? 이덕무는 네 가지 이유를 들었다. 배고플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낭랑해져 배고픈 줄 모르고, 추울 때 읽으면 온몸이 펴져 추위를 잊으며, 근심이 있을 때 읽으면 모든 상념이 사라지고, 기침할 때 읽으면 기운이 통해 기침이 멎는다고 했다. 책은 그에게 단순한 지식의 원천이 아니라 삶의 고통을 견디게 하는 약이었던 것이다.

 

 

사소한 일상, 그 속에서 발견한 우주

 

이덕무의 시선은 특별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작은 것들에 마음을 기울였다. 《이목구심서》에는 귀로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입으로 말한 것, 마음으로 생각한 것들이 담겨 있다.

 

차 끓는 소리, 아침 노을과 저녁 노을, 어린아이의 울고 웃는 모습, 시장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 그에게는 모든 것이 시의 소재가 되고 기록의 대상이 되었다. 벌이 창문 종이를 뚫으려는 소리에서 억센 힘을 발견하고 어항 속 붕어의 번쩍임에서 생명력을 느꼈다.

 

오늘날 우리가 인스타그램에 일상을 기록하듯 그는 소매 속에 늘 책과 필기구를 넣고 다니며 보고 듣고 생각나는 것을 적었다. 메모의 달인이었던 그가 남긴 16종의 책은 이렇게 탄생했다.

 

 

백탑 아래 모인 친구들, 신분을 넘은 우정

 

이덕무에게는 특별한 친구들이 있었다. 백탑(지금의 탑골공원) 주변에 모여 살던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이들은 양반과 서얼이라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 진정한 벗이 되었다.

 

특히 박제가와의 우정은 각별했다. 둘 다 서얼 출신으로 같은 아픔을 지녔지만 성격은 정반대였다. 이덕무는 유순하고 내성적이었고 박제가는 불같고 거침없었다. 그럼에도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했다.

 

가난에 시달리다 못해 가장 아끼던 《맹자》를 팔아 밥을 해먹은 이덕무가 유득공을 찾아가 자랑하자, 유득공도 《춘추좌씨전》을 팔아 술을 사서 나눠 마셨다는 일화는 가난한 선비들의 우정을 보여주는 가슴 뭉클한 장면이다.

 

1779년, 정조는 서얼 출신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했다. 서얼에게 닫혀있던 관직의 문이 조금 열린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정식 관원이 아닌 잡직에 불과했고 일정한 녹봉도 없었다.

 

 

고요한 마음으로 시대의 아픔을 기록하다

 

이덕무의 글에는 묘한 쓸쓸함이 배어있다. "슬픔이 닥쳤을 때는 사방을 돌아봐도 막막할 뿐이다. 다행히 나는 두 눈을 지니고 있어 조금이나마 글자를 알고 있으므로 손에 한 권의 책을 든 채 마음을 달래고 있노라면 무너진 마음이 약간이라도 안정이 된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의 한계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문체반정의 회오리 속에 자신의 글쓰기를 반성하는 자송문을 쓰기도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3세, 그가 남긴 《청장관전서》는 71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이었다.

 

박지원은 이덕무의 죽음을 이렇게 애도했다. "지금 그의 시문을 영원한 내세에 유포하려 하니 후세에 이덕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또한 여기에 구하리라. 그가 죽은 후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볼까 했으나 얻을 수가 없구나." - 《연암집》 

 

 

결핍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한 인간의 품위, 작은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섬세한 감수성, 신분의 벽을 넘어 진정한 우정을 나눈 따뜻한 마음. 그는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풍요로웠다. 병약했지만 정신만은 건강했다. 책과 벗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식을 넓히는 퀴즈

 

문제 1. 이덕무가 스스로를 부른 별명은?

1) 청장관

2) 간서치

3) 형암

4) 아정

 

문제 2. 이덕무가 속했던 실학파 그룹의 이름은?

1) 북학파

2) 남인파

3) 백탑파

4) 소론파

 

문제 3. 이덕무가 말한 책 읽기의 네 가지 이로움이 아닌 것은?

1) 배고픔을 잊게 한다

2) 추위를 잊게 한다

3) 부자가 된다

4) 근심이 사라진다

 

정답: 문제1-2번, 문제2-3번, 문제3-3번

 

 

오늘의 정리 - 이덕무(1741-1793)

 

인물개요

  •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문장가
  • 서얼 출신으로 평생 신분의 한계 속에서 살았던 경계인
  • 정조 시대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

 

핵심 별명과 호

  • 간서치 - 책만 보는 바보
  • 청장관 - 그의 호
  • 형암 - 또 다른 호

 

주요 저서

  • 《청장관전서》71권 - 평생의 저술을 모은 문집
  • 《이목구심서》- 일상의 소소한 관찰 기록
  • 《사소절》, 《앙엽기》, 《사기시윤》등 16종의 저술

 

대표적인 일화

  • 겨울밤《한서》를 이불로, 《논어》로 문틈을 막고 독서
  • 하루 종일 햇빛을 따라 이동하며 책 읽기
  • 가장 아끼던 《맹자》를 팔아 끼니 해결

 

함께한 사람들

  • 백탑파 -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 정조 - 서얼 출신 학자들을 검서관으로 발탁한 임금

 

이덕무가 남긴 메시지

  • 책은 삶의 고통을 견디게 하는 약이다
  • 사소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의 가치
  • 신분을 넘어선 진정한 우정의 힘
  • 결핍 속에서도 정신적 풍요를 추구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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