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Korean History)/역사 속 생활, 문화(Life & Culture in History)

백의에서 몸뻬까지 - 일제강점기 복식이 말하는 정체성과 통제

by 김쓰 2025. 9. 3.
반응형

일제강점기 시대 복식 변화를 상징하는 정물을 이미지화해보았다

글·사진 김쓰

 

일제강점기, 우리 조상들의 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체성이었고 자존심이었으며, 때로는 조용한 저항의 언어였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롭게 옷을 고르고 입는 일에도 그 시절 숨죽여 울던 역사가 배어 있다.

 

 

백의민족의 눈물 - 흰 옷을 빼앗긴 사람들

 

1910년대 경성의 골목에서는 흰옷 단속이 일상이었다. 순사들은 길 모퉁이에서 두루마기와 저고리를 훑어보며 색복을 장려했다. 지면은 위생과 절약을 명분으로 흰옷의 비효율을 주장했고, 공공 영역에서는 흰옷 기피가 규범처럼 확산됐다. 어떤 노인은 단속대에 두루마기를 빼앗긴 날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흰옷은 그에게 체면이자 자리였다. 색복 장려는 위생과 절약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집단 정체성의 상징을 흐리려는 통치 전략이었다.

 

Q: 일제는 왜 흰 옷을 기피했을까?

 

A: 흰옷은 '우리는 조선인'이라는 연대의 표지였다. 집단의 상징을 흐리고 황국신민으로 동화하려면 먼저 눈에 띄는 표지를 약화해야 했다. 색복 장려는 그 첫 단추였다.

 

 

몸뻬가 된 우리 어머니들 - 전쟁이 바꾼 여성의 일상

 

태평양전쟁이 격화된 1940년대, 보도는 여성의 생산 전선 참여를 독려하는 표제를 자주 올렸다. 공장과 관공서, 교통 현장에서는 바지 차림을 요구하는 규정이 늘었고, 지역에 따라 몸뻬 미착용 승차를 제한했다는 기사도 이어졌다.

 

실제로 전시 말기에는 "몸뻬를 입지 않은 여성은 관공서와 집회장·극장·식당 출입을 제한하고 전차·버스 승차를 거부"하는 조치가 시행되었다는 정리 보고가 남아 있다. 시집을 앞둔 젊은 여성에게 몸뻬는 문화적 충격이었지만, 활동성은 분명했다. 해방 이후에도 밭일과 시장일에서는 몸뻬가 실용복으로 남았다. 억압의 산물이 생활복의 표준이 되는 역설이었다.

 

 

전시 생활 개선 조치와 복식 통제의 행정 장치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가 고도화되면서 생활 전반을 규율하는 행정 명령과 지침이 쏟아졌다. 절약과 능률을 이유로 의복 재질, 색상, 형태를 표준화하려는 시도가 확대되었고, 각 기관은 복장 준수 여부를 점검했다. 법과 행정의 언어가 몸의 형태와 움직임까지 재단하던 시기였다. 

 

본문에서 언급한 색복 장려와 국민복 필착 같은 조치들 또한 이러한 전시 생활 개선의 틀 속에서 작동했다. 지방지 기사 정리에는 "색복을 장려한다. 12월 1일을 시작으로 전면적으로 일반에게 독려할 예정"과 같은 시책 추진 문구가 확인된다.

 

 

신여성의 도전 - 짧아진 저고리와 새로운 시대

 

1920~30년대 경성의 전차 정류장과 다방에는 짧은 저고리, 긴 치마, 단발의 신여성이 등장했다. 신문 논설은 풍속의 문란을 꾸짖고, 만평은 양장 흉내를 비꼬았지만, 그 복식은 여성 해방과 근대적 자아의 표현이었다. 나혜석과 같은 이들은 글과 그림, 옷을 통해 시대를 밀어 올렸고, 개량한복은 서양식 재단과 기능을 받아들이면서도 한복의 선과 여밈을 지켜냈다. 길 위의 시선은 차갑고 폭력적이었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옷차림은 일상의 정치였고, 보폭은 곧 권리였다.

 

Q: 신여성의 복식 개혁은 친일적이었을까?

 

A: 일본이 주도한 근대 프레임과 닿는 지점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수는 외래 양식을 단순 추종하지 않았다. 전통과 근대를 조화시키며 우리 방식의 근대를 몸으로 시험했다.

 

 

국민복과 제복의 시대 - 획일화된 몸들

 

1938년 국가총동원체제가 시행된 뒤, 관보와 통첩에는 복장 규정이 빼곡히 실렸다. 조선총독부 관보에는 "비상시 국민복" 제정과 함께 상의·중의·외투·모자 등 제식이 공표되며 규격 통일과 물자 절약을 명시했다. 1940년 11월 7일 관보 4139호에는 국민복 제도가 고시되고, 이후 "신체제의 국민복"이 법령으로 재정비되었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현실에서도 카키색 계열의 국민복이 공무서와 학교, 공장으로 확산했고, 회사는 근무 시 국민복 필착을 사규로 명시했다. 출근길 전차 칸은 같은 색의 천으로 가득했고, 도시는 규격화된 몸들이 움직이는 풍경으로 변했다. 해방 직후 국민복은 친일의 옷으로 인식되어 급속히 퇴장했지만, 그 옷을 입은 모든 사람이 친일파였던 것은 아니다. 강제와 생계, 규정 때문에 입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옷은 낙인의 매개가 되었고, 사람의 사정은 보이지 않았다.

 

 

교복·회사복 규정이 일상에 끼친 영향

 

제복화는 공장과 관공서에 그치지 않았다. 교복과 회사복은 학생과 직장인의 하루를 규격화하며, 규율의 촘촘한 그물을 일상으로 끌어들였다. 교문 앞에서는 모자, 각반, 벨트 착용을 확인하는 풍경이 낯설지 않았고, 출근길 계단에서는 상의 단추 여밈을 점검받곤 했다. 청소년과 직장인의 일과는 옷차림으로 시작해 옷차림으로 평가받았고, 복장의 규격은 곧 삶의 리듬을 정하는 규칙이 되었다.

 

 

작은 저항들 - 일상 속에서 지켜낸 것들

 

겉옷은 색을 입었지만 속옷은 끝내 흰색을 고집한 이들이 있었다. 혼기가 다가오는데 혼례복을 제대로 차릴 수 없자, 장인은 밤에 등잔불 아래에서 붉은 비단을 숨겨 바느질했다. 시장의 고무신 가게에는 둥글고 넓적한 코와 꽃무늬를 눌러 찍은 신이 걸렸다. 외래 재료였지만, 신발만큼은 우리 발과 눈에 맞게 만들었다. 명절이면 해가 지고 골목이 조용해질 때 한복을 꺼내 입었다. 문살에 스미는 저고리의 그림자와 조심스레 나누던 노래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것

 

복식 정책은 문화가 어떻게 정치가 되는지 보여준다. 권력은 몸을 규정하고, 몸으로 삶을 규정하려 했다. 오늘 우리가 자유롭게 옷을 고르는 일은 누군가 피와 땀으로 지켜낸 권리다. 백의의 자부심을 지킨 이들, 억압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실천한 신여성들, 일상에서 정체성을 붙든 평범한 사람들. 그들의 손끝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다. K-패션이 세계를 누비는 지금, 그 빛 아래에는 아픈 시간을 꿰맨 바늘땀이 있다. 복식은 옷을 넘어, 살아 있는 역사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