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 김쓰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는 당시 현역 육군 포병 소위이자 김구가 이끌던 당의 당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숙소 겸 집무공간이었던 서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살해당했다. 우리나라 역사에 이름을 크게 남긴 인물이라 알고 있었지만, 암살을 어떻게 당했다... 그런건 잘 모르고 있었기에 짤막하게 다뤄보려 한다.
백범 김구 암살 사건?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는 숙소 겸 집무공간이었던 경교장에서 당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총에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사건은 6월 26일 낮, 현역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경교장에 나타나 김구에게 면담을 요청하면서부터이다. 당시 김구의 비서였던 선우진이 먼저 온 손님의 면담이 끝나자 안두희를 김구의 방에 안내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김구의 집무실 공간이었던 2층에서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래층 응접실에 있던 비서 선우진과 이풍식 그리고 그밖의 경비원들이 급하게 위로 올라갔다. 당시 백범 김구의 비서였던 선우진은 김구를 다다미방으로 모시고 이웃해 있는 적십자 병원에 의사를 부르라고 했다. 1층으로 다시 내려왔을때, 제압당한 안두희는 쓰러져있었고, 경비실에서 연락을 받은 경찰이 그를 데려가려하자 정체모를 군인들이 떼지어 몰려와 범인이 군인이라는 이유로 안두희를 끌고 갔다고 한다. 당시 선우진 비서는 이를 암살 음모공작 현장으로 보고 있다.
백범 김구를 저격한 안두희는 누구인가?
안두희는 집안 대대로 부유한 지주 집단 출신으로서 일제시대 당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유학파 출신이기도 했다. 당시 반공정신도 투철하다고 평가되던 그가 김구를 암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2009년 11월 3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인 CIC 정보원이자 정신 요원으로 우익 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처음으로 밝혀졌다고 공개한바 있다.
1949년 6월 29일에 작성된 미 육군 정보군 문서파일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미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조지 실리 소령은 백범 암살 직후인 1949년 6월 29일 문서를 작성하였는데, 이 문서에는 김구 암살관련 배경정보라는 제목 아래 나는 그를 정보원으로 후에 한국 주재 CIC요원으로 알고 있었다하였는데, 안두희는 백의사 혁명단 1소조 구성원으로 백의사 지도자인 염동진이 명령을 내리면 암살을 거행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백의사 : 낙양군관학교 재학시절 김구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던 염동진이 장제스 휘하의 반공 결사단체인 남의사를 모방하여 1944년 11월 서울에서 월남한 청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반공 결사조직이다. 이 단체는 반공 테러활동과 함께 미군 CIC와 연계하에 대북 첩보활동을 펼친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염동진 : 1909년 경기 파주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1932년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당시 학생들은 김구 계열과 이청천 계열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염동진의 경우 이청천 계열로 김구와는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안두희는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안두희는 백범 김구를 암살한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육군 포병 소위였던 안두희는 김구를 암살한 뒤 곧바로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석달 뒤 15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한국 전쟁의 발발로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포병장교로서 1951년 잔형을 면제받고 대위로 전역하였다. 1953년 2월 15일에는 복권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에 분개한 곽태영에게 1965년 피격을 받았으나 목숨을 건지고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숨어지낸다. 이후 1987년 3월 민족정기구현 권중희 회장에게 발각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1994년에는 국회 법사위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 조사 소위원회의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하였으나 김구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1996년 10월 23일 안두희는 인천시 중구 신흥동 집에서 당시 버스기사였던 박기서에게 피살당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에 의하면 1948년 여순사건 진압부대였던 한국 4연대가 여순반란자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승만 정부와 북한 정권과도 다른 파시스트적인 정부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정부의 수반으로는 김구를 옹립하려 했다는 기록 또한 있었다. 더불어 염동진이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김구의 밀고로 인해 중국 공산당에 넘겨져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맹인이 되었다고 하니 김구 암살 지시가 개인적인 원한이 없진 않으리라 추측한다.
김구 암살 사건은 이념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우익에 의한 살해였을까? 개인의 원한으로 인해 벌어진 일인 것일까? 모를일이다. 좀 더 후대에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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