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사진 / 김쓰
"제자님, 어제 멧돼지 사냥은 어떠셨습니까?"
1569년 가을, 도산서당의 아침 강학 시간. 평소 「논어」와 「맹자」만 논하던 퇴계 선생의 입에서 뜻밖의 질문이 흘러나왔다. 전날 밤 마을에 출몰한 멧돼지를 잡으러 나섰던 제자 이덕홍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선생님께서 그런 속된 일을..."
말끝을 흐리는 제자를 보며 퇴계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학문이란 것이 어찌 책 속에만 있겠는가? 그대가 어제 밤 느꼈을 두려움과 긴장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한 협동의 마음. 그것이 모두 살아있는 공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제자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바로 퇴계 이황이었다.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에 오른 대학자이면서도 제자들의 일상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이는 따뜻한 스승. 하늘의 이치를 논하면서도 땅의 삶을 잊지 않았던 진정한 철학자.
오늘날 우리는 퇴계를 천원권 지폐 속 근엄한 얼굴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그의 진짜 모습은 어땠을까? 아침마다 제자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웃음꽃을 피웠고 때로는 낙동강가를 거닐며 자연의 이치를 논했던 그.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 시골 서당에서 진리를 찾았던 그의 삶은 성공과 출세만을 좇는 현대인들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안동 진보에서 시작된 위대한 여정
1501년 음력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재의 안동시 도산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훗날 조선 성리학의 큰 별이 될 이황의 탄생이었다. 그의 아버지 이식은 진보현감을 지낸 인물로 선비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이황이 태어난 지 불과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린 이황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어머니 춘천 박씨는 자식들의 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특히 막내였던 이황에게는 더욱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런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 교육열은 훗날 이황이 대학자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과거 급제와 관직 생활
1527년(중종 22년) 27세의 이황은 생원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진사시에도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리고 1534년 3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며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승문원 부정자를 시작으로 홍문관, 예조, 이조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퇴계는 평생 49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렸다. 당시 조선은 사화의 피바람이 불던 시기였고 정치적 다툼에 환멸을 느낀 퇴계는 학문에 전념하기를 원했다. "나는 본래 산림에서 살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세상일에는 재주도 없고 뜻도 없습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권력보다는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선택했다.
주자학과의 운명적 만남
청년 이황이 성리학, 특히 주자학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20대 초반의 일이었다. 당시 조선은 이미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받아들인 지 10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아직 그 철학적 깊이를 제대로 탐구한 학자는 많지 않았다. 이황은 주희의 저작들을 탐독하며 성리학의 심오한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는 단순히 중국의 성리학을 수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의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고 발전시켰다. 특히 인간의 마음과 본성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며 독창적인 철학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사단칠정론, 조선 성리학의 꽃을 피우다
퇴계 철학의 정수는 바로 '사단칠정론'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인간의 감정을 사단(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칠정(희, 노, 애, 구, 애, 오, 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이론이다. 사단은 맹자가 말한 네 가지 선한 마음의 단서를, 칠정은 일곱 가지 인간의 기본 감정을 의미한다.
퇴계는 '이기불잡', 즉 이(理)와 기(氣)가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이는 인간의 선한 본성과 현실적 욕구를 명확히 구분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후대 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조선 성리학의 독자적인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 희 : 기쁨, 노 : 분노, 애 : 슬픔, 구 : 두려움, 애 : 사랑, 오 : 미움, 욕 : 욕구
이(理)와 기(氣)의 개념 설명
성리학에서 이는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이자 도덕적 법칙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왜 그래야 하는가'의 원칙이다. 반면 기는 현실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현상과 물질을 뜻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원칙이 이라면 실제로 부모님께 안부를 묻고 돌보는 행동은 기의 영역이다.
사단칠정 논쟁, 조선 지성사의 분수령
사단칠정론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조선 성리학계를 뜨겁게 달군 대논쟁의 중심이었다. 16세기 후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기론, 사단칠정론을 주제로 윤리 사상에 있어 중요한 논쟁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황과 기대승, 이이와 성혼 간의 논쟁이다.
퇴계는 사단이 중절한 칠정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사단을 '이발(理發)'로, 칠정을 '기발(氣發)'로 구분했다. 즉, 사단은 순수한 도덕적 본성에서 나오는 감정이고 칠정은 기질의 영향을 받는 일반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을 엄격히 구분하는 퇴계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모든 감정이 기발이며, 사단은 칠정 중에서 선한 부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쟁은 단순한 학술 토론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감정 그리고 도덕의 근원을 탐구하는 깊이 있는 철학적 대화였다.
이발설, 퇴계 사상의 독창성
퇴계의 이발설은 그의 사단칠정론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다. '사단과 칠정이 모두 정이나 발하는 근원이 다르다'는 호발설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주희의 성리학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조선 성리학의 독립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퇴계는 '리가 드러나면 기가 따르고, 기가 드러나면 리가 타고 있다'는 독특한 표현으로 자신의 이론을 설명했다. 이는 도덕적 감정(사단)과 일반적 감정(칠정)의 발생 메커니즘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사단칠정론은 그의 학문을 계승한 학자들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이황과 직전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단칠정론의 특징은 이황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발전했다.
퇴계의 대표 저작들
퇴계는 평생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성학십도」는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대표작이다. 1568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선조에게 올린 이 책은 성리학의 핵심을 10개의 도표로 정리한 것으로 군주가 성인이 되는 길을 제시했다.
「퇴계집」은 그의 시문과 편지를 모은 문집으로 여기에는 제자들과 주고받은 서신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그의 편지글은 학문적 토론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안부와 격려가 담겨 있어 퇴계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자성록」은 자신을 반성하는 글을 모은 것이고, 「언행록」은 제자들이 스승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것으로 퇴계의 일상적인 가르침과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도산서당, 교육의 성지가 되다
1560년, 환갑을 맞은 퇴계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곳에 도산서당을 지었다. 이곳은 단순한 은거지가 아니라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의 요람이었다.
도산서당에서 배출된 제자들은 조선 중기 정치와 학문을 이끌어갈 인재들이었다. 특히 유성룡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서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징비록」을 저술하여 후세에 교훈을 남겼다. 김성일은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후 정확한 정세 판단을 했던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퇴계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과 실천을 겸비한 인물로 성장했다.
도산서당에서 퇴계는 제자들과 함께 경전을 읽고, 토론하며, 시를 짓는 일상을 보냈다. 그의 교육 방식은 일방적인 주입식이 아니라 제자 개개인의 특성을 살려주는 맞춤형 교육이었다. "남의 단점을 들추지 말고,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돌아보라"는 그의 가르침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준다.
성호 이익으로 이어진 학문의 맥
퇴계의 학문은 그의 사후에도 면면히 이어졌다. 특히 18세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은 퇴계 학문의 충실한 계승자였다. 이익은 서학과 전통 성리학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뚜렷한 사승 관계를 보였다. 이익은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근기남인(조선 후기에 서울과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남인 계열의 학자 집단) 퇴계학파의 종주로 인정받았다.
성호 이익의 맹자 해석서인 「맹자질서」를 통해 우리는 근기실학이 어떻게 퇴계학을 계승하고 창신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퇴계 학문이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고 발전하는 살아있는 사상임을 보여준다.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지 450여 년. 그의 사상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성과주의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경(敬)"의 정신을 통해 내면의 평화를 찾으라고 속삭인다. 갈등과 분열로 얼룩진 사회에 "인(仁)"의 가치를 일깨운다.
무엇보다 퇴계가 평생 추구했던 '위기지학', 즉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진정한 배움의 자세는 오늘날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스펙 쌓기에 급급한 우리들에게 진정한 인격 수양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상식을 넓히는 퀴즈
문제 1. 퇴계 이황이 태어난 해는 언제인가?
1) 1501년
2) 1511년
3) 1521년
4) 1531년
문제 2. 퇴계가 강조한 철학적 원칙으로 이(理)와 기(氣)가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무엇이라 하는가?
1) 이기일원론
2) 이기이원론
3) 이기불잡
4) 이기상수
문제 3. 퇴계의 학문을 계승하여 18세기 실학의 기초를 다진 학자는 누구인가?
1) 율곡 이이
2) 성호 이익
3) 다산 정약용
4) 남명 조식
정답 : 문제1-1번 / 문제2-3번 / 문제3-2번
퇴계 이황의 발자취
안동지역은 조선시대 수많은 명사와 현철들을 배출시킨 인재의 보고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심에는 퇴계 이황이 있다. 안동지역에는 퇴계가 태어나 자라고 여생을 보낸 곳으로 퇴계와 관련된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주요 유적지
도산서원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퇴계가 직접 설계하고 제자들을 가르친 도산서당과 사후 건립된 도산서원
- 관람료 : 어른 1,5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600원
- 관람시간 : 하절기(3-10월) 09:00-18:00, 동절기(11-2월) 09:00-17:00
퇴계종택
- 퇴계가 태어나고 성장한 집(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 조선시대 양반가의 생활상과 퇴계 가문의 검소한 삶을 보여줌
퇴계묘소
- 도산서원 인근 위치
-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으로 퇴계의 삶을 반영
계상서당
-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또 다른 교육 공간
관람 팁
- 추천 동선 : 퇴계종택 - 도산서원 - 퇴계묘소
- 교통 : 안동 시내에서 도산서원까지 차로 약 30분
- 준비물 : 편한 신발, 계절별 준비물
- 연계 관광 : 안동하회마을, 봉정사, 안동 전통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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