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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Korean History)/인물탐구(People in Korean History)

유득공이 되살린 역사, 조선이 잊은 나라 '발해'

by 김쓰 2025.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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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이 발해에 대해 연구하는 모습을 형상화해보았다

글, 사진 / 김쓰

 

역사책을 펼치면 통일신라 다음은 고려다. 그런데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 조선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발해라는 나라가 200년 넘게 만주와 연해주를 호령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그 긴 침묵을 깬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영재 유득공이다.

 

 

조선이 발해를 잊은 이유

 

고려가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만 있었다. 발해는 거란에게 멸망했고 그 역사는 고려로 이어지지 못했다. 조선 성종 때 나온 《동국통감》도 마찬가지였다. 발해를 그저 신라의 이웃 나라 정도로만 언급했을 뿐이다.

 

이렇게 조선의 역사 인식은 '삼국 중심'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했고 고구려를 비하하는 시각도 담겨 있었다. 조선 중기까지도 발해는 말갈족의 나라로 여겨졌고 우리 역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화이사관(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 다른 민족을 오랭캐로 보는 사상)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발해 멸망 후 고려로 넘어온 유민이 10만 명이 넘었는데도 고려는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다. 유득공은 훗날 이 점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고려가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영토를 되찾을 명분을 잃었다"고.

 

 

서얼 출신 책벌레, 규장각에서 역사를 만나다

 

유득공은 1748년 남양 백곡 외가집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 서자였기에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서얼이었다. 5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외가와 서울을 오가며 자랐다.

 

20세 무렵부터 박지원을 만나 북학파의 일원이 되었다. 백탑(지금의 파고다 공원) 주변에 모여 살던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등과 어울리며 시문을 나누었다. 이들을 '백탑동인'이라 불렀는데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문학 동호회였다.

 

정조가 서얼허통령을 내린 덕분에 1779년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다.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와 함께 '4검서'로 불렸다. 검서관은 왕실 도서를 관리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는데 유득공은 여기서 중국과 일본의 사료까지 두루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세 번이나 중국에 다녀왔다. 1778년 첫 연행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현장을 직접 목격했는데 이것이 《발해고》를 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발해고, 잊힌 229년을 복원하다

 

1784년, 유득공은 마침내 《발해고》를 완성했다.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고려가 삼국사를 편찬한 것은 옳지만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책의 구성은 체계적이었다. 왕고는 발해 역대 왕들의 기록이고 신고는 83명의 신하와 학자들을 다뤘다. 지리고는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정리했고 직관고는 문무관직 체계를 설명했다. 복색고는 품계에 따른 관복 색깔과 휴대품을, 물산고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기록했다.

 

특별히 국서고에는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들이 실려 있다. 무왕이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지녔다"는 구절은 발해의 정체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유득공은 《신당서》, 《구당서》등 중국 서적 17종과 《삼국사기》, 《고려사》등 한국 사서, 《속일본기》등 일본 사서까지 총 22종을 참고했다. 발해가 멸망한 지 800년이 넘어 자료가 부족했지만 최대한 많은 문헌을 수집하고 검증했다.

 

 

전체 9고 구성 참고용 정리

 

순번 항목(고) 내용 요약
1 왕고 역대 발해 왕들의 계보와 업적
2 신고 신하 83명 소개 및 관직 설명
3 지리고 수도, 행정구역(5경 15부 62주 등)
4 직관고 관직 체계 전반
5 복색고 품계에 따른 복식, 색상 등
6 물산고 지역별 특산물 및 자원
7 풍속고 생활문화, 풍속
8 국서고 일본 등 외교문서, 발해 정체성 드러남
9 유장고 멸망 후 유민 및 장수들의 행적

 

 

남북국 시대, 새로운 역사 인식의 시작

 

유득공의 가장 혁신적인 주장은 '남북국' 개념이었다. 그는 발해고 서문에서 "신라가 남쪽을 차지하고 발해가 북쪽을 차지했으니 이를 남북국이라 부른다"고 선언했다. 통일신라가 아닌 남북국 시대였다는 것이다.

 

그의 역사관은 단순한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기록의 균형과 사료에 대한 책임감이 핵심이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점을 22종의 문헌으로 입증하려 했고 각 기록의 신뢰성을 꼼꼼히 따졌다.

 

"기록이 없는 역사는 사라진다"는 그의 생각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실제로 유득공은 중국과 여진의 역사 왜곡에 대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유득공 발해고, 오늘의 교과서가 되다

 

현재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는 '남북국 시대'를 정식으로 가르친다.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통일신라와 함께 존재한 또 하나의 한국 고대 국가로 인정한다.

 

이는 모두 유득공의 《발해고》에서 시작됐다. 조선 후기 한치윤의 《해동역사》,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도 유득공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들어서는 신채호, 박은식 등 독립운동가들이 발해사를 민족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강조했다.

 

2010년대 이후 《발해고》번역본 판매량이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는 것도 흥미롭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 역사를 지키려는 시민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이다.

 

 

유득공은 1807년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발해고》는 완벽한 역사서가 아니었다. 스스로도 아직 역사를 완성하지 못해 고(考)라 이름 붙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조선 역사학의 판도를 바꿨다. 한반도에 갇혀 있던 역사 인식을 만주와 연해주로 확장시켰다. 잊혀진 발해를 되살려 우리 역사의 정당한 자리를 찾아줬다.

 

오늘날 학생들이 배우는 남북국 시대는 240년 전 한 서얼 출신 학자의 외로운 싸움에서 시작됐다. 기록의 힘을 믿고, 역사의 균형을 추구했던 유득공. 그가 남긴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상식을 넓히는 퀴즈

 

문제 1. 유득공이 1784년 완성한 발해 역사서의 이름은?

1) 삼국사기

2) 발해고

3) 동국통감

4) 해동역사

 

문제 2. 유득공이 제시한 새로운 시대 구분 개념은?

1) 삼국시대

2) 통일신라시대

3) 남북국시대

4) 후삼국시대

 

문제 3. 유득공이 규장각에서 맡았던 직책은?

1) 대제학

2) 검서관

3) 승지

4) 참판

 

정답: 문제1-2번, 문제2-3번, 문제3-2번

 

 

오늘의 정리

 

유득공(1748-1807)

서얼 출신 실학자로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을 지냈다. 박지원, 이덕무 등과 함께 북학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발해고》의 의미

  • 1784년 완성된 최초의 발해 전문 역사서
  • 총 9고 구성 : 왕고, 신고, 지리고, 직관고, 복색고, 물산고, 풍속고, 국서고, 유장고
  • 중국·한국·일본 사료 22종을 참고한 실증적 연구

 

핵심 업적

  • 남북국 시대 개념 최초 제시
  • 발해를 고구려 계승 국가로 규정
  • 조선의 삼국 중심 역사관에서 벗어나 역사 인식의 지평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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