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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Korean History)/인물탐구(People in Korean History)

김옥균, 조선에 과학의 길을 놓다

by 김쓰 2025.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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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등 아래 책을 든 젊은 개화 지식인과 전신주 및 철도가 있는 풍경을 구현해보았다

글·사진 김쓰

 

19세기 말, 조선은 변곡점에 서 있었다. 낯선 기계음과 불빛, 지도를 바꾸는 철길과 전신망이 동아시아를 흔들었다. 그때, 한 청년은 책과 사람, 제도를 통해 '과학으로 나라를 움직이는 법'을 배워 돌아왔다. 김옥균, 그의 설계도는 왜 좌절되었고 무엇을 남겼을까. 이제, 그의 발자취를 따라 근대의 문을 여는 열쇠를 다시 건져 올린다.

 

 

박규수 사랑방, 새로운 세계와의 첫 만남

 

1870년대 초, 한양 북촌의 사랑방. 노학자 박규수의 집에는 젊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김옥균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중국을 거쳐 전래된 《해국도지》와 《영환지략》을 접했다.

 

서양의 지리와 신문물을 소개한 책들은 그에게 강렬한 각성을 안겼다. 증기기관이 만들어내는 동력, 전신이 열어젖힌 순간의 통신, 철도가 가져온 공간의 축소.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박규수는 단순한 감탄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젊은이들과 서양의 지식과 원리를 함께 토론하고, 조선의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고민했다. 이 사랑방은 조선 개화파의 요람이었고, 김옥균의 과학과 기술에 대한 열망이 싹튼 곳이었다.

 

 

일본에서 목격한 근대의 충격

 

1881년 말부터 1882년까지 김옥균은 일본을 방문해 메이지 유신 이후 급변하는 현실을 직접 목격했다. 가스등이 비춘 도시의 밤, 증기기관차가 질주하는 철도, 전신망과 우편·은행 같은 제도의 정비. 불과 수십 년 사이 일본은 완연한 변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한 정계·지식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서구의 학문과 제도·기술을 단순히 모방하는 대신 자국 현실에 맞게 변용하는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김옥균은 조선 개혁의 청사진을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한성순보, 지식의 회로를 열다

 

1883년, 조선 최초의 근대적 관보 성격의 신문인 《한성순보》가 발행되었다. 근대적 인쇄와 유통의 장을 통해 정치·경제·학술 기사와 함께 세계 정세 및 서구 학문·기술을 소개하는 글들이 점차 다뤄졌다. 신문은 근대적 정보의 보급로로 기능하며 '지식의 문턱'을 낮추는 계몽의 통로가 되었다.

 

《한성순보》는 단순한 소식지를 넘어 합리와 실증을 중시하는 관점을 사회에 뿌리내리려는 시도였다. 비록 발행 기간은 짧았지만, 근대 지식의 회로를 연 상징적 의미는 분명했다.

 

Q: 김옥균은 어떤 방법으로 서양의 지식을 조선에 소개했나?

 

A: 《한성순보》라는 공적 매체를 통해 근대적 인쇄·유통 체계를 마련하고, 정치·경제·학술과 함께 제도·기술 관련 정보를 사회에 확산시켰다. 신문은 새로운 지식과 관점을 보급하는 핵심 통로가 되었다.

 

 

치도약론, 인프라와 위생으로 설계한 미래

 

김옥균의 근대 구상이 응축된 글 가운데 하나가 《치도약론》이다. 1884년, 그는 도로를 국가의 동맥으로 보고 과학적 측량과 체계적 설계를 바탕으로 한 도로망 정비를 역설했다. 단순한 길 넓히기가 아니라 배수와 가로 조명 등 도시 인프라 전반을 포함하는 시각이었다.

 

그는 위생 제도의 정비와 상수도·의료 체계의 근대화를 주장했으며, 농업에서는 개량 품종과 새로운 농기구, 화학 비료 등 생산성 혁신을 촉구했다. 이는 '기술 도입'을 넘어 행정·산업·일상 전반을 과학적으로 재편하려는 구상이었다.

 

 

갑신정변, 꺾인 날개와 남겨진 설계도

 

1884년 12월, 김옥균과 동지들은 개혁 강령을 내걸고 거사에 나섰다. 개혁안에는 문벌 폐지와 인재 등용, 재정 일원화, 우정과 통신·군제 등 제도 정비가 담겼다. 정변은 3일 만에 좌절되었고, 김옥균은 망명길에 올라 1894년 상하이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자주적 근대화의 창은 급격히 좁아졌고, 조선은 이후 외세의 압력 속에서 궤도를 잃었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제안과 실천은 사라지지 않았다. 신문을 통한 지식 보급의 경험, 인프라와 위생·교육·산업을 과학적으로 개편하려는 발상은 후대 개화 지식인들에게 영감이 되었다.

 

Q: 갑신정변의 실패는 김옥균의 과학·기술 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A: 정치적 좌절로 자주적 근대화의 추진 동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제도·기술 개편은 본격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구상은 이후 계몽 운동과 제도 개편 논의의 사상적 자산으로 남았다.

 

 

개혁 강령과 '과학적 행정'의 접점

 

강령의 핵심이던 재정 일원화와 군제·통신·우정 정비는 인프라와 정보 흐름, 행정 효율을 높이려는 방향이었다. 지식과 기술의 도입만으로는 변화가 완성되지 않는다. 이를 뒷받침할 조직과 규범, 기록과 예산, 인력과 교육 체계가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근대'는 제도화된다. 김옥균의 설계도는 바로 그 연결부를 겨냥해 있었다.

 

 

유산과 오늘의 시사점

 

오늘 김옥균을 돌아보는 이유는, 그가 기술을 도구가 아니라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 문물을 맹목적으로 좇지 않고 조선의 조건에 맞게 창조적 변용을 지향했다. '자주적 근대화'라는 비전은 오늘의 기술 주권과 과학 대중화라는 과제와 맞닿아 있다.

 

그가 꿈꾸던 경로와 달리 근대 기술은 식민지적 경로를 통해 대거 유입되었지만, '배워서 우리 것으로 만든다'는 정신은 이후 과학자와 기술자 세대에 이어졌다. 19세기 말 어둠 속에서 과학의 빛을 좇았던 한 청년의 꿈은, 오늘의 기술 대한민국을 비추는 등불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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