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사진 김쓰
도시는 늘 앞을 향해 달려왔고 건축은 그 속도를 조용히 받아 적어 왔다. 어느 날 오후, 노출콘크리트 벽에 스친 빛이 바닥을 길게 쓸고 지나갈 때, 사람들은 차가운 재료를 통해서도 손의 체온을 느낀다. 김수근은 그 체온을 공간에 남기는 방법을 모색한 건축가였고, 그가 남긴 발화는 공존과 균형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전통과 현대, 안과 밖. 서로 다른 것들이 한 장 안에서 겹치고 밀려나는 장면을 따라가 본다.
김수근 건축 철학 - 인간과 자연의 공존
그는 "무엇을 지을 것인가"보다 "어떻게 함께 있을 것인가"를 먼저 묻는 건축가였다. 벽돌의 무게와 목재의 결, 노출콘크리트의 러프 텍스처, 커튼월(비내력 외피)의 투명도를 병치시켜 재료가 각자의 목소리를 내게 두는 방식은 김수근이 즐겨 택한 설계 문법이다. 코트야드(중정)와 라이트웰(수직 채광 샤프트), 포치(반외부 전이 공간)로 빛과 바람의 길을 곧추세우는 수법은 그의 작업에서 반복되는 장치이며, 보이드와 매스의 대비, 공간 시퀀스, 시지각 축은 사용자의 움직임을 문장처럼 엮어 체험을 구성한다.
자연을 끌어들이는 방법
마당과 처마, 대청으로 이어지는 전통 주거의 전이 논리를 현대 재료와 공법 위에 다시 엮는 일은 김수근이 일관되게 탐구한 주제였다. 대지 계획 단계에서 보이드와 코트야드를 배치하고 라이트웰과 루버로 데이라이팅과 통풍을 조직하는 방식은 그가 실무와 글에서 제안해 온 설계의 뼈대다. 비와 햇살, 그늘의 시간차를 실내로 들이는 이 전략은 '한국적 감수성'에 대한 그의 해석이 구체(디테일)로 내려앉은 결과다.
도심 속 사색의 장면, 종교 건축
종교 건축에서 포치와 보이드가 만드는 반외부 시퀀스는 예배 전후의 시간을 부드럽게 전환시키고, 상부 라이트웰의 자연광과 노출콘크리트의 러프 텍스처는 침잠의 리듬을 만든다. 시지각 축과 레벨 차로 짜인 행렬 동선은 함께 모이는 장면과 홀로 머무는 순간을 비켜서게 한다. 이 장면화된 장치들은 김수근이 종교 공간을 다룰 때 반복해 구사한 어휘이며, 도시 속에서 사색의 밀도를 확보하려는 그의 의도를 반영한다.
예술의전당, 초기 구상의 흔적
국가 문화 인프라를 향한 비전은 초기 계획 단계의 구상에서 뼈대를 얻고, 이후 다수 주체의 협업을 거쳐 완성도와 층위를 더했다. 공연장에서는 잔향시간·초기반사·확산·가변 흡음체 같은 실내음향의 골격 위에 플라이타워, 곡면 셸, 커튼월이 포개진다. 이 같은 통합적 사고는 김수근이 초기 구상에서 그려 보인 '기능과 상징의 동시성'이라는 방향과 닿아 있으며, 관객은 수치가 아닌 "소리와 빛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경험으로 그 흔적을 체감한다.
일상과 건축의 경계, 사옥과 작업실
사옥과 작업실은 일터이면서 실험실이었다. 오픈플랜과 아트리움 중심의 수직 보이드, 코어(수직 동선과 설비 집중) 주변의 스튜디오·모델숍 배치는 김수근이 조직과 공간을 한 몸처럼 설계했다는 증거다. 큰 스팬과 캔틸레버로 확보한 여유, 라이트웰과 루버로 조절되는 빛의 결은 휴먼 스케일을 지키며 실험을 품게 한다. "비워 둔 자리에서 가능성이 자란다"는 그의 태도는 사옥의 여백과 동선의 리듬으로 구체화된다.
공간사옥과 '공간'의 생태계
공간사옥은 작업과 담론의 허브로 작동했고, '공간'은 현장에서 길어 올린 질문을 언어로 확장했다. 층층의 보이드와 회랑, 반층 높이의 계단과 식재는 만남과 시야의 리듬을 세팅했고, 그 리듬 속에서 설계, 비평, 전시가 서로의 속도를 조율했다. 건물과 글, 전시와 토론이 같은 질문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되묻는 이 생태는 김수근이 구축한 '건축-조직-매체' 삼각 구도의 실제 작동 원리였다.
재료와 디테일의 어휘
노출콘크리트의 거푸집 결을 숨기지 않는 선택, 벽돌 줄눈의 리듬, 커튼월 모듈의 반복과 유리의 깊이, 루버 간격과 그림자. 이 디테일은 표피를 장식으로 쓰지 않고 촉각적 경험과 표피-구조의 호흡을 포갠다. 코너의 모따기와 핸드레일 단면까지 신경이 닿아 있는 이유는, 김수근에게 디테일이 사용과 시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는 선택의 이유가 보이고, 멀리서는 전체의 문장이 또렷해진다. 그 사이의 초점 이동이 곧 그가 말한 공간의 문법이다.
한국 현대건축에 남긴 것
그가 남긴 것은 형태 몇 가지가 아니라 질문하는 습관이다. 장소를 어떻게 읽을지, 재료를 어디까지 믿을지, 사람과 시간이 한 장의 평면 안에서 어떻게 공존할지. 이 질문들은 스튜디오와 현장에서, 교육과 실무의 경계에서 반복되었다. 그 반복은 다음 세대의 문장으로 이어졌고, 오늘의 도시는 그 문장을 다른 어휘로 다시 연습하고 있다.
마무리
바람이 담장을 넘고, 빛이 처마 아래로 들어오며, 발걸음이 동선을 문장으로 바꾼다. 건축은 그 문장을 오래 읽히게 만드는 일이다. 김수근의 작업은 그 방법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며, 다음 문장을 써 내려가기 위한 빈 페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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