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사진 김쓰
서울의 어느 여름날, 나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거대한 탑 앞에 섰다. 1003대의 텔레비전이 빛나는 '다다익선' - 백남준이 남긴 이 거대한 비디오 조각품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수많은 화면이 동시에 깜빡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한 사람의 예술가가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생각했다.
서린동에서 시작된 예술가의 여정
1932년 7월 20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부유한 섬유업자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백남준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심취했다. 그가 예술가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고, 도쿄대학교에서 미학과 음악사를 공부하며 쇤베르크의 음악에 매료되었다.
1956년, 백남준은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뮌헨대학과 프라이부르크 음악원에서 공부하던 그는 1958년 다름슈타트 하기강좌(현대음악제)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바로 실험음악의 거장 존 케이지와의 만남이었다. 이 만남은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음악의 경계를 허물고 일상의 소리까지 예술로 끌어안는 케이지의 철학은 백남준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었다.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하며 백남준은 더욱 과감해졌다. 피아노를 파괴하고, 바이올린을 끌고 다니며, 넥타이를 자르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당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비디오 아트의 탄생 - 전자의 붓으로 그리다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 백남준은 여기서 세계 최초의 비디오 아트 전시회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을 열었다. 13대의 텔레비전을 조작하여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낸 이 전시는 미술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텔레비전은 더 이상 단순한 정보 전달 매체가 아니라, 예술가의 캔버스가 되었다.
'TV 부처'는 백남준의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부처상이 자신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비치는 모니터를 응시하는 이 작품은 동양의 선(禪) 사상과 서구의 첨단 기술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준다. 명상하는 부처와 끊임없이 변화하는 전자 이미지의 대비는 영원과 순간, 정적과 동적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백남준은 텔레비전이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매체임을 일찍이 간파했다. 그는 이 일방적인 소통 도구를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관객이 수동적 수용자에서 능동적 참여자로 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래의 예술가는 화가의 붓 대신 전자의 붓을 사용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오늘날 디지털 아트의 시대를 정확히 예견한 것이었다.
위성으로 연결된 지구촌의 꿈
1984년 1월 1일, 새벽의 뉴욕과 파리가 위성으로 연결되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단순한 TV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그린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백남준식 반박이었다. 백남준은 기술이 인간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고 소통하게 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존 케이지,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 필립 글래스(Philip Glass) 같은 예술가들이 대서양을 넘나들며 실시간으로 교류했다. 대중예술과 아방가르드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 미술,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글로벌 실시간 소통의 선구적 실험이었다.
백남준은 이후에도 '바이 바이 키플링'(1986), '손에 손잡고'(1988) 등의 위성 프로젝트를 통해 예술로 세계를 하나로 묶는 꿈을 계속 추구했다. 그에게 위성 기술은 단순한 통신 수단이 아니라, 인류애를 실현하는 도구였다.
미디어 아트의 지평을 넓히다
백남준의 영향력은 비디오 아트를 넘어 현대 미디어 아트 전반으로 확장되었다. 그가 아베 슈야(Shuya Abe)와 함께 개발한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는 영상을 실시간으로 조작하고 변형할 수 있게 했다. 이는 오늘날 VJ들이 사용하는 영상 믹싱 기술의 원형이 되었다.
로봇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다. '로봇 K-456'부터 '로봇 가족'에 이르기까지, 백남준은 기계와 인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탐구했다. 폐기된 TV와 라디오로 만든 이 로봇들은 기술 문명의 폐기물을 예술로 재탄생시킨 것이었다.
백남준은 기술을 예술적 매체로 재해석하여 시대를 초월한 주제와 현대 문화 및 미래의 미디어 환경을 연결했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의 삶과 예술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했다.
동서양의 만남, 경계를 넘는 예술
백남준의 예술에는 동양과 서양, 과거와 미래, 기술과 전통이 공존한다. 한국의 무속 신앙 '굿'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 선불교의 명상적 요소를 담은 설치 작품들은 그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는 서구의 첨단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예술 언어를 창조했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그의 말처럼, 백남준은 고대와 현대, 자연과 기술을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바라보았다. 이러한 통합적 세계관은 오늘날 융합과 통섭의 시대정신을 선취한 것이었다.
백남준은 예술가의 엘리트주의적 권위에 반기를 들고, 관객을 능동적 문화 생산자로 재정의했다. 그는 미술의 민주화를 꿈꾸었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시대를 예견했다. 오늘날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누구나 영상을 만들고 공유하는 시대가 온 것을 보면, 그의 비전이 얼마나 선견지명이었는지 알 수 있다.
살아 숨 쉬는 백남준의 유산
2006년 1월 29일, 백남준은 마이애미에서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예술의 불꽃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그의 작품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관객들을 만나고 있으며, 전 세계의 미디어 아티스트들은 그가 열어놓은 길을 따라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백남준이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고,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예술적으로 탐구한 선구자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인공지능, 가상현실, 메타버스가 일상이 된 지금, 그가 제기한 질문들은 더욱 절실해졌다. 기술은 인간을 소외시키는가 아니면 연결하는가? 예술은 어떻게 기술을 인간화할 수 있는가? 그의 작품은 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한다.
백남준이 꿈꾼 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는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그가 상상한 지구촌은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남긴 것은 기술적 혁신이 아니라,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차가운 기계에 따뜻한 인간의 온기를 불어넣고, 분리된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며, 닫힌 미래를 열린 가능성으로 바꾸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는 그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림을 준다.
다시 다다익선 앞에 선다. 1003대의 텔레비전이 만들어내는 빛의 향연을 바라보며, 한 예술가의 꿈이 얼마나 멀리까지 닿을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백남준이 남긴 것은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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